발레는 내게 그렇게 왔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하였다.
첫사랑이었다.
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
https://youtu.be/cDSE6jzt09c?si=iZ8oQnQ8YQWCN3iS
발레는 내게 그렇게 왔다.
사랑의 물리학처럼 발레도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내가 발레를 처음 배웠을 때, 나는 언제든 적당히 배우다 그만둘 것이라는 생각을 수 도 없이 했었기 때문에 훗날 내가 발레에 대한 사랑이 싹트고 그 마음이 깊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든 관둘 수 있다는 전제는 굳이 필요이상의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레를 배우는 거 자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고, 특히나 생소한 프랑스 발레용어조차 못 알아듣기 일쑤이었기 때문에 매일 같이 연습실을 가면서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니는 회사원들처럼 그렇게 나는 숨죽여 티 나지 않게 발레학원을 다녔던 기억이 난다.
사랑이 사랑인 줄 모르고....
혹여 누군가는 처음부터 발레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발레를 시작하셨던 분들도 있었겠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전자의 경우가 아니었다. 내가 발레 연습실을 처음 갔었을 때, 그날은 봄꽃이 피기 전에 공기가 엄청 쌀쌀했던 어느 봄날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 입시가 코 앞에 가장 큰 문제로 직면해 있었던 고3 학생이었고 부전공으로 발레를 배우러 가서 발레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
크지 않았던 연습실에서 처음으로 보았던 발레바(Ballet bar)와 큰 거울, 그 홀 안을 가로지르던 낯설었던 차가운 공기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세월이 이렇게 오래 흘렀어도 그날의 기억이 이렇게 선명한 건 나는 언제든 발레를 배우다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할 때 떠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전공으로 할 건 아니라는 생각, 그러니 굳이 그렇게 큰 부담감을 가질 건 없다는 생각들이 내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습실 안에서도 나는 크게 주눅 들지 않았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았던 그 시절은 그렇게 마음의 부채조차 무겁지 않아서 그 모든 게 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는 전공자가 되었다고 가정하면 내용이 대부분이 180도 다르게 해석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발레를 입문했던 초반에 그렇게 발레는 내게 적당한 거리 두기의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게 가능한 이야기로 존재했었다. 결국 대학 입시 결과가 과정만큼 중요한 시기에 맞물려 결국 마지막 선택을 발레로 전공하게 되었을 그때조차도 선뜻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나 욕심이 앞을 가려 마음이 부풀어지지 않았던걸 보면 발레는 그만큼 내게 어렵고 힘든 존재이기도 했다.
해마다 학기 초, 반에서 사귀고 싶은 가장 예쁜 반 친구 같은데 도도하고 콧대가 세서 나랑 이야기도 안 할 것 같았던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말하면 조금 이해가 되시려나? 괜스레 어설프게 말을 걸었다가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 같았던 그런 마음이 처음엔 훨씬 더 컸다는 이유로 존재에 대한 감정이나 이해보다 나 자신의 살길과 감정에 훨씬 더 크게 다가왔던 암흑의 시간이 내겐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그런 시간들이 지나 나는 발레와 천천히 친해지고 나니 처음과는 다른 여러 가지 감정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처음엔 사랑이 사랑인 줄 몰랐고 그 사랑이 깊어질 때마다 마음속의 혼란도 따라서 수렁처럼 깊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렇게 당당하게 아무 때나 사랑하는 여자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나려고 생각하고 사는 나쁜 남자처럼 굴었을 것이고 언제든 관둘 수 있다는 사표와 면죄부가 마음속 한편에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언제나 그 마음은 매일같이 복잡하고 심난했다. 그래서일까? 그런 시간들이 다 지나고 어떤 인생의 결정을 내 스스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발레는 내게 그렇게 운명처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음을 나는 직감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사진출처: 김윤식 사진작가(대문사진)
2024 k-art 발레단 고궁 음악회 리허설. Yoon6ph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