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완벽한 착각.
슬플 때 자장면을 먹어본 사람들은 안다.
비는 내리고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을 때 자장면을 먹어본 사람은 안다.
그때 나무젓가락을 쪼갤 때 나는 작은 소리조차 마음을 가르고·····
그 짠맛과 그 값싼 기름기가 비벼주는 위안·····
숟가락을 따로 들지 않고 단출한 접시에 담긴 그 검은 액체에 비벼 먹는 국수의 후두득거림이 주는 위안에 대해서.....
-공지영 <착한 여자>중에서 -
우연이 운명이 되기까지의 아이러니.
고3이 되어 입시에 몰두해야 할 그 시기에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가 3월의 초 봄이었고 첫 번째 금요일이어서 학교에 가기 위해 등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아버지가 사망하셨다는 연락이 집으로 왔었고 그날부터 3일 동안은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렀던 기억이 난다.
돌아가셨다는 표현보다 아버지를 잃었다는 표현을 썼던 이유는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뺏긴 그런 청천벽력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고 아직도 그때의 기분과 슬픈 감정은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건 하루아침에 갑자기 뚝 끊어져버린 천륜이 그저 슬프고 억울해서 여전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잃고 나니 어제까지 아버지 덕분에 누리던 그 모든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한 순간에 하나둘씩 변해 버리는 경험은 생각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모든 게 붕 떠서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경험들을 뭐라 쉽게 말로 표현되는 일도 아니었고 그로 인한 생기는 일들은 도미노처럼 그렇게 하나씩 뒤로 밀리기 시작하고 있음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다.
그것은 마치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렇게 하나둘씩 천천히 건물에 금이 가는 걸 직접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말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매일같이 눈앞의 살얼음판 위를 혼자서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에 불이 나서 집이 또 한 번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가족들 모두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바로 대피했던 건 신의 가호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재산의 대부분 크게 손실되고 나니 그때부터는 정들었던 집을 떠나 집을 줄여서 이사를 해야 했고 집안의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인생이 겹경사 아니면 줄초상이라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막상 직접 그렇게 그런 일을 겪고 나니 혼잣말도 그렇게 말이 씨가 되어 이렇게 되기도 하는구나 싶어서 그때부터는 혼잣말조차 조심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대학입학 전부터 친인척들과 엄마의 지인분들께서 이제부터는 아버지도 안 계시고 엄마 혼자서 너랑 형제들 모두 다 잘 키우기가 너무 힘든데 딸인 네가 왜 그렇게 비싼 예술 공부를 꼭 그렇게 해야겠냐는 핀잔도 적지 않게 들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한 것도 아니었고 그 말이 틀렸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이 위기를 극복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그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젊어서 선택의 기회가 많았던 그때, 나는 옳고 그름을 먼저 판단하기보다 되도록이면 정공법으로 모든 걸 직접 부딪히는 방법을 택했던 건 무엇보다 내가 한 선택에 대한 확신이 남들보다 간절했기 때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 또한 못된 나의 또 다른 선택이기도 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운 좋게 은행에 취직하는 행운을 얻었고 1년 정도 근무하다가 본점에 스카우트될 수 도 있다는 파격적인 조건에도 제안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내고 연기 전공을 하는 대학원을 진학했던 건 사실 돌이켜보면 스스로에게는 엄청난 명분을 준 것처럼 느껴졌겠지만 남들이 보기엔 저 이기적이고 대책 없는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하고 보는 시각도 절대적으로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르지 않았고 모른척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당장은 타인의 비난과 조언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더 집중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반대의 목소리에 굴하지 않고 그 당시 유행했던 소설책 제목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더 크게 겁먹고 두려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의 엄마는 나를 끝까지 믿어주셨고 그 힘든 시간에 조차 주변의 염려와 비난을 방패처럼 막아주시면서까지 딸의 인생을 응원해 주셨다.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했던 첫 번째 이유가 나는 지금처럼 문화가 융성한 시대는 아니었지만 반드시 문화가 발전할 거라는 기대와 확신이 내겐 있었고 그래서 대학원 진학을 해서 좀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을 다니고 싶었던 이유로 진학을 했던 것이 가장 크고 절실한 이유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원하는 직장을 다니기보다 예술사나 발레에 관한 글을 써 보면 어떻겠냐?라는 교수님의 권유는 처음엔 정말 너무 싫었고 받아들이기 조차 힘들었다.
얼마나 이 일이 하기 싫었던지 별의별 핑계를 다 생각해 내서 이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을 명확한 명분을 찾고 싶어서 한때는 혈안이 되기도 했었다. 감언이설로 이 일을 하라고 권유하신건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설득하신 덕분에 한 학기가 끝나갈 즈음엔 이미 전과는 많이 다른 마음의 나를 보게 되기도 했었다.
처음부터 "네. 제가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하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아~~ 이 일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엔 이미 꽤 많은 세월이 흘러 가 있었다.
라면만 먹더라도 가난에 굴하지 말고 10년 동안은 예술책을 집중적으로 읽고, 춤 잡지를 거의 다 찾아서 읽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글 쓰는 일에 토대가 되는 일에 집중해 줬으면 좋겠다는 교수님의 당부를 지난 일이니까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사실 점심값도 아껴가면서 회사도 안 다니면서 책만 읽었던 시간들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내게도 무척이나 힘들고 버겁고 무거운 시간들이기도 했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거짓말 안 하고 골백번도 더 하기도 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언제가부터 이 일을 쉽게 그만두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마음과 행동이 달라서 늘 쭈볏쭈볏 하며 우물쭈물했을런는지는 몰라도 호기롭게 "그래, 이만큼 했으니까 됐어. 나는 이제 그만둘 거야"라는 말은 머릿속에서 상상만 했지 실행에 옮기기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건 너무나 오랜 시간 공들여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던 시간들과 그 시간들 안에서 혼자서 오롯이 견뎌낸 그 어떤 특별한 힘이 내게 남아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진짜 책임감과 자존심.
만약 내가 발레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가 첫 직장으로 다녔던 은행을 그대로 다니면서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돈이 없을 때마다 솔직히 수 도 없이 여러 번 하곤 했다. 직장을 관두고서라도 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이미 고생은 당연히 예약된 수순의 일이었지만 기약이 없는 이 일을 두고 마치 신(神)에게 행운을 맡겨두고서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그 행운을 찾으러 반드시 오겠다고 선전포고하거나 그렇게 무례한 사람들처럼 똑같이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내겐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감이었고 밥을 굶더라도 비굴하지 않아야 했던 건 진심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당함의 원천은 라면을 먹더라도 비굴하지 않아야 하는 내가 직접 그 10년의 세월을 무게감을 겪어 보고 나서야 나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이런 책임감과 자존심을 뼛속깊이 새긴 이유는 가난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가난 앞에서 조차 비굴하지 않아야 함을 누구보다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런 마음을 가르쳐 준 것은 발레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돈이 없어서 밥을 매일같이 비어있는 지갑 때문에 겨우 한 끼 이상 먹기 힘들 때조차 이젠 날씬해질 일 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했던 건 긍정적인 마음의 끝판왕이 되려는 본인의 강렬한 의지만큼 마음속 깊이 새겨진 책임감과 자존심 덕분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힘듦을 직접 겪어보니 생각보다 가난하다는 건 혹독하고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때의 그런 힘든 시간이 겪고 나서야 맞이한 모든 순간에 그저 감사하며 사는 건 힘들게 사는 건 삶 자체가 사는 게 녹록지 않아서를 알게 되어서 이기 때문이고 마음처럼 원하는 일이 되지 않는다고 짜증 내 버릇하는 건 성숙하지 못한 인간들이 하는 행동이라는 걸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좋아하는 일 하나 제대로 하려면 싫어하는 9가지 이상의 일을 해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인생에서 그렇게 나를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있었다. 우연이 저렇게 운명으로 마주하고 서 있게 되기까지의 시간 앞에서 흘린 내 눈물 바가지의 숫자는 셀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지겹고 괴로웠겠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게 억울하지만은 않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결국 나의 선택은 지금과 똑같을 것이고 그에 대한 책임도 모두 내 몫이니까 누구의 탓도 할 수 도 없다.
발레를 통해 배운 책임감과 자존심 덕분에 가장 젊었을 때 그 지루하고 힘든 시간들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물론 화가 나기도 하고 주체 못 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겪을 때마다 왜 이런 선택을 해서 이렇게 사는 게 고통스럽고 지겨울까? 하며 짜증 난 적도 셀 수 없이 많이 있었겠지만 돌고 돌아도 결국 제자리에 돌아올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마주하고 서 있을 때 그 처절한 운명 앞에서 나는 달리 어떤 다른 선택을 할 기회조차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나름 잘 버텨내는 힘에 대해 길들여지고 있었을 것이고 돌아가려고 해도 이미 너무나 먼 길을 혼자서 걸어온 탓에 돌아갈 길도 모르고 내 손에 가야 할 길의 지도도 없다는 사실은 딱히 그 어떤 다른 명분이나 대안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연조차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함은 내 몫의 선택만이 내게 남아서가 아니라 사는 동안에 이제 내게 별 특별한 수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던 걸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도망가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치는 방법을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어느 순간부터 직감한 뒤로는 내 인생이었지만 내 마음대로만 살았던 건 아니었다는 걸 알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그 완벽한 착각이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사진출처: 김윤식 사진작가(대문사진)
2024 k-art 발레단 고궁 음악회 리허설. Yoon6ph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