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도 힘이 된다.
삶의 반은 시궁창을 기어 다니던 기억으로 이루어진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어떤 이든 한 인간의 마음속에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누구에게든 아직도 숯불처럼 지글거리며
빨갛게 타오르는 상처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상처도 힘이 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으며
저는 창밖을 바라봅니다.
공지영. <상처 없는 영혼> 중에서....
고백(告白)
지난 석 달 동안 저는 신혼 때부터 살고 있던 우리 집을 차근차근 부분 리모델링을 하고, 밀린 짐정리 및 집정리도 해야 되었고, 중간에 가족들과 아이 방학을 핑계 삼아 2번이나 국내여행을 다녀왔더니 몸에서 보내는 싸인은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올린 글은 유명 관광지에 가서 까지 혼자서 노트북을 들고 가서 2시간 만에 쓴 글이기도 했죠. 그날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제 사정'이라고 생각하고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문뜩 예전에 제가 그토록 동경하고 부러워마지 않았던 상상 속의 저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노트북도 없이 그냥 노트에 글을 끄적이면서도 열심히 글을 썼던 제가, 노트북을 살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힘들었던 제가, 비싼 커피를 마실 여유가 없어서 그냥 당장 그날 먹을 음식만 사서 먹어야 했던 그때가 갑자기 제 기억 속을 스치고 나니 써야 할 글이 생각나기보다는 갑자기 주책맞게 카페 구석에 노트북을 켜고 앉아있던 저는 괜스레 눈물을 닦으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게 되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저는 늦은 결혼에, 늦을 출산에, 또래 엄마들보다 늦게 학부모가 되어서 느끼는 감정들이 제 또래 친구들과는 공감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저도 저의 친구들도 서로가 암묵적으로 보이지 않게 피곤해하며 그 오랜 우정을 지켜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늦은 결혼보다 훨씬 더 힘들고 괴로웠던 것은 아이를 키울 때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있기도 하고 그랬죠. 특히나 아이의 친구들과 아이 엄마들 사이에서의 공감과 교감은 사실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기도 했어요. 그래도 그때 제가 가장 잘한 일은 제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포기한 체 제 아이에게 최대한 집중해 준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만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아이의 노력이 더 컸다는 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되기도 했었죠. 그래서 지금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아이를 보는 일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으로 자리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는 제가 늘 쓰고 싶었던 글에 대한 열망이 어떤 것인지 처음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저 막연했다는 표현이 가장 잘 맞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무엇을 어떻게 잘 쓰고 싶었던 것인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서 자주 헷갈려하기도 했었죠. 그 와중에 제가 어떤 선택을 해서 어떻게 제대로 된 글을 쓰는 게 맞는 것인지에 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수많은 무용책을 읽어야 해서 읽어보았지만 어느 날부터인지 그 책들이 가엾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읽히지조차 않고 버려지는 그 글들에 대한 속상함과 아쉬움을 있었기 때문에 만약에 제가 글을 쓴다면 제가 자주 들었던 클래식 FM 가정음악에서 예술가들을 소개했던 코너인 "가볍지 않게, 무겁지 않게"라는 콘셉트로 잡고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죠.
예전과는 다르게 잘 쓸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아는 만큼만 써 보자"라는 마음이 생긴 순간부터 이 원고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당연한 간절함 같은 것이지만 저의 마음보다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글을 쓴다는 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한 것이니까요. 잘하고 싶은 마음이나 어떤 교만한 마음이 들더라도 그냥 아는 만큼 쓰고, 생각나는 만큼만 쓰면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 연재 중인 이 브런치 북이 지금의 제가 가장 마음을 담아 열심히 쓰고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제는 감기 몸살이 너무 심하게 와서인지 약만 하루종일 먹고 있어도 차도가 없어서 그냥 병원에 가서 링거라도 맞아야 하나? 싶을 정도의 컨디션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다시 거실 서재에 앉아 이렇게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징크스(Jinx)
지각이나 결석에 대해 관대했던 시절이 있었죠. 아프거나 다치거나 했을 때 뭐 상황 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레를 배울 당시 원장 선생님께서는 그랬다가는 불안해서 내일 학원을 더 가기 싫어질 것을 대비해서 발레학원 구석에 얇은 담요를 덮고 개구리 자세를 하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더라도 무조건 발레학원에 있으라던 선생님 말씀대로 학원 마룻바닥에서 누워있던 때도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경험치가 많지 않아서 인지는 몰라도 그 말이 맞고 틀리고 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 또한 그냥 하라고 하시니 그게 맞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Yes or No"가 정확한 편이었지만 또 잘 모를 땐 가만히 있는 게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는 보기와 다르게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려는 습관이 제겐 있습니다.
특히나 제게 상대방이 3번 이상 당부나 주의를 주는 일에는 제 스스로 최대한 조심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제 생각만큼 중요한 것이 타인의 생각과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최악의 컨디션이 될 때에도 학원 구석이 쭈그려 있어도 그래도 그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믿게 된 다음부터는 지각, 결석과 시간 약속에 대해선 제 스스로 가장 엄격하고 단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언제나 그렇게 잘하고 싶어 했던 마음에 비해 늘지 않았던 마룻바닥 아래의 실력이 향상되는 기점은 늘 본인이 가장 하기 싫어하던 그 지루한 순간을 이겨내고 그냥 순종하듯 몸을 움직여야만 하던 순간이었다는 것을 어느 날 문뜩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을 때와 하기 싫을 때의 감정보다 "그냥 무조건 해야지~ "하고 했던 그 순간에 저는 조용히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갈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인간의 삶에 그 누구의 어떤 삶이라도 과연 그 어떤 정답과 해답이 있겠습니까? 그저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자 숙제이긴 하겠지만 순간순간 이겨내야 하는 그때마다 도망칠 궁리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저는 그 순간에 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누군가를 위한 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최선'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죠. 왜 발레를 해서만 인생을 배웠겠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를 통해서 반성하고 깨달아갈 때마다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안 쓰면 잊히고, 안 쓰면 쓰기 싫어지고, 안 쓰면 제가 기억하는 그 한모든 순간들이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순간과 찰나의 기록'이라는 명제는 사실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기도 합니다. 기억하려면 써야 하고 쓸려면 준비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하는 일들을 통해 준비된 글들이 인터넷이라는 바다에 뛰어나갈 수 있는 것이겠죠.
춤을 출 때만큼 글을 쓰면서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안 좋은 컨디션이었어도 이렇게 노트북을 열고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 기쁘고 행복했고 독자 여러분들 덕분에 감사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최대한 컨디션 조절 잘해서 더 정성스러운 글을 다음 주에 쓰고자 노력하는 한 주가 되면 좋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모두 감기 조심 하시고 행복한 한 주 보내세요!
사진출처: 김윤식 사진작가. 2024 K-art 발레단. 고궁 음악회 리허설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