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우리가 함께 추었던 그 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안개꽃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드는 안개이고 싶다.
나로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 복효근 -
안개꽃처럼 서 있던 20대 초반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인생은 참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무용학과에 입학했을 때 한 1~2년은 맨 뒷줄에서 존재감 없이 병풍처럼 조용히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실력이 뛰어나지 못 한 상태에서 무용학과에 입학한 것이라면 이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무용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연습이 아니라 실전으로 공연준비를 필수로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단체 생활의 1번은 모두가 협동(協同)해야 빛나는 하모니가 되기 때문이고 또한 매일같이 수업후에 기본 발레 연습을 무조건 모두가 모여서 결석자 없이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일 같이 돌아오는 주말도 일요일은 쉬더라도 토요일엔 거의 학교 연습실에 나가서 연습을 해야 했고 개인적인 스케줄이나 특별히 아프지 않은 이상, 학교의 출결여부는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나 시간에 민감한 그 집단에서는..
위아래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만 자란 나는 그렇게 여자들이 많은 집단에 들어가 대학생활을 하게 될 줄 몰랐고 가뭄에 콩 나듯 있던 남자 선배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봤자 어른이 돼서 보면 스무 살, 스물한 살이라고 생각하면 별 반 다를 게 없는 상황에서도 그때는 군대문화처럼 꼬박꼬박 나이와 상관없이 학년 위주로 호칭이 '선배님'이라고 큰 소리로 불러야 했고 늦은 생일에 이른 입학을 해도 무조건 위계질서를 핑계로 '선배님'이라고 부르면서 인사를 깍듯히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단체생활이 주는 위압감이라는 걸 처음 느꼈을 땐 사실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들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행동으로도 혼을 내지 않았지만, 아마도 나 혼자 조용히 셀프 공포에 벌벌 떨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내가 학부를 다닐 때 무용학과 학생들은 정원수는 보통 40명이었고 그 안에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가 가나다 이름순으로 섞여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들도 좌충우돌 천방지축이기 일쑤이었던 것은 우리들의 나이가 20대이었고 각자의 몫만 연습해 온 아이들이 모여 서로가 서로의 춤을 존중하며 각자 연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집에서도 못 느낀 자매애나 형제애 같은 것도 그 시절 내가 배웠던 감정들이었다. 그래서 학부를 졸업하고 그 시절 같은 공간에 있었던 친구나 동기, 혹은 선후배를 우연히 다시 만나도 어김없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신기한 경험들을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 같은 추억이 있다는 것 때문에 나에게서 그 시절의 그 경험들은 남자들이 20대 초반에 무조건 가야 했던 군부대처럼 각인되어 있기도 하다.
훈련되어 있지 않는 훈련병을 가르친다는 것은..
발레는 철저하게 훈련에 의해 만들어지는 예술이다. 그래서 적당한 타협이란 게 없다. 최선을 다해 내야 하는 예술이고 나만 잘해서 되는 예술도 아니었으며 각자 맡은 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빛나는 협동의 작업이라는 것을 학부에 가서 몸으로 부대끼며 매일 같이 혼나고 욕먹으면서 배웠다. 그래서 학부 졸업하고도 거의 연락 없이 지내다 우연찮은 기회에 그때 그 시간을 같이 보냈던 사람들을 만나면 어제 만나서 연습하고 헤어진 사람들처럼 깔깔대고 웃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 친밀감이 무척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부만 놓고 보면 4년 동안 매일 같이 보고, 공연하고, 같은 교수진들 사이에서 함께 수업을 받고 집처럼 연습 후에 샤워실을 돌아가면서 썼던 그 경험들로 인해 생긴 친밀감이었을 것이다.
학원에서의 연습생 시간도 그렇게 친밀감이 있지만 결국 20대 초반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들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빛나던 시절에 함께 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발레 연습실에서 보는 풍경은 매일같이 달라지고 훈련되는 동작들은 매일같이 같은 훈련들의 반복이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 실기 선생님들조차 자세를 잡아주시면서 달래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셨지만 결국 발레를 잘한다는 것은 기본을 잘해야 하는 것이고 제대로 된 몸을 만들어 놔야 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춤을 추는 사람으로서의 태도와 인성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나 센스 등을 배운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무용학과 다닐 때 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때 내가 썼던 일기장의 글들을 보면 나는 왜 그렇게 춤을 못 출까? 나는 왜 그렇게 살을 더 못 뺐을까? 나는 왜 어제 그 음료수를 마셨을까? 하는 자책이나 그때 또래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상세히 써 놓았고 매일같이 그렇게 썼어도 훗날 두 번 다시 잘 읽어보지는 않는 악순환이 있을지라도 글을 계속 썼던 덕분에 나는 이 브런치 북을 부족하지만 어렵지않게 쓸 수 있는 큰 자양분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사람들은 누구나 만약에... 그때 내가 그랬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도 자주 그랬다. 발레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혹은 내가 발레를 너무 잘해서 꿈에서라도 출연하고 싶었던 발레단의 무용수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보곤 했다. 물론 이 글들을 쓰기 전에는 나는 인정받는 무용수가 되었더라면 나는,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해 봤는데 결론은 나는 춤에 대한 집중력과 노력이 부족했고 조금만 아파도 잘 참지 못 했기 때문에 다시 신이 내게 "너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라고 하셨다 한들, 나는 결국 또 활자에 홀릭되어 도서관을 가고 밤마다 글을 쓰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일었던 갈증들 때문에 공연을 보러 극장에 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 말은 "제자리걸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학부까지 발레를 했던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히 감사하다. 취미 생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한 때 내 모든 것을 한번 걸어보았던 그 시절을 지금도 그 한 번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돌아가지 못하고, 돌아갈 명분조차 없지만 어떻게 해도 결과가 같다고 생각한 다음부터는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뜻이고 우리 때보다 지금의 국공립 단체들의 댄서들은 정말 다들 군무를 하는 댄서든, 솔리스트 이든, 수석 무용수 이든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가지 않는 길에 대한 미련으로 삶을 후회하거나 망치는 사람들을 살면서 가끔 보기도 한다. 그런 그들에게 그래도 먼저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서 말할 기회가 있다면 지나간 시간으로 인해 자신을 망치지 마시기를.. 언제나 오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일어나시기를.. 그리고 그렇게 어둠 같은 시간들도 천천히 그래도 걸어 나가시다 보면 그 길 끝에 터널이 끝이 나 있다는 걸 분명 알게 되실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단언컨대 참는 자에게 복이 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었다. 그래서 인생은 살만한 것이고 열심히 잘 살아갈수록 빛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문사진: 김윤식 사진작가.
2024 k-art 발레단.고궁 리허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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