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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너무나 당연한 이유

삶에서 성실하면 반드시 얻어지는 것들에 대하여..

by 홍지승

글쎄, 글은 말이야. 이게 그림이라도 좋고, 음악이라도 좋고, 무용이라도 좋고, 어떤 예술 장르이건 말이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고. 그건 오는 거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고. 오히려 7년 동안 쓴 단편이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여서 억지로 뜯어고쳤을 확률이 더 높은 거야. 그런데 이 '오는' 영감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평소에 활자에 예민해 있어야 하고 많은 글들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고 있어야 하고 삶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관찰하고 통찰한 데이터들이 머릿속에 있어야 해. 그러고는 앉아서 친구가 놀자고 메신저로 아무리 말을 걸어와도 아무리 재미있는 축구 시합이 있어도 그런 것들을 물리친 채로 앉아 있을 마음의 용기와 엉덩이의 끈기가 필요한 거야.

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중에서 예술은 오는거야 편-




인생에서 성실해야 할 삶의 이유


성실(誠實)의 뜻이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니 정성스럽고 참됨이라고 나와있었다. 무릇 인생에서 성실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누구나 익히 다 아는 사전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렇게 삶을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살아보니 매일, 매번, 성실하게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 또한 우리들의 인생이긴 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겠지. 그래서 이쯤에서 해야 할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내가 겪은 경험당을 쓰고자 한다. 미리 앞전에 말씀드린 대로 요즘 같은 세상에서 예술을 한다는 건 예중, 예고를 나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대체가 어디서부터 껴서 시작을 해야 하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빠른 성장이 가능한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춤을 춘 친구들을 이겨낼 방법이 란 건 애당초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인간이 갖고 있는 어떤 천재성과 특별함은 내가 노력해서 노력만으로 가져지는 것도 아니었고 세상을 창조하신 신(神)이 내게 선물처럼 만들어서 이 세상에 보내질 때 옵션으로 1+1으로 보태어진 것이 아닌 다음에야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한번 사는 인생에서 성실하게 살아야 함을 더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에 가까운 일이었다. 특히나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일을 업(業)으로 삼았을 경우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이 불안한 마음들을 달래주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발레를 배우기 전부터 일기를 가끔씩 쓰기는 했었지만 그때의 일기는 지금 읽어도 그냥 밋밋하기 그지없는 일기라기보다는 업무일지 같은 느낌의 체크리스트이었다. 그래서 그때 당시의 감정들이 빠진 글자들의 향연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 부분들의 페이지를 읽다 보면 뭐가 이렇게 심심하고 지루하지? 싶은 감정들이었다면 발레를 배우면서부터 썼던 초창기 글들부터는 분노와 억압, 도대체 왜 나만 안 되는 거지? 하는 식의 자기 분노가 절정에 이르러서 썼던 글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심각하다 못해 글이 안 되면 연필로 일기장 안 쪽에 발레 동작을 그리고 전체 사진을 스케치까지 해서 일기에 그릴 정도로 열의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지금 중년의 나이에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내가 나를 봐도 귀엽고 재미있는 스토리이지만 당시의 내 감정은 보통의 10대가 갖는 롤러코스터의 감정 그 이상에 무언가를 잘하고 싶은 열망만 앞서 있던 덕분에 그때의 내가 가진 소녀의 광기는 생각보다 훨씬 살벌했던 시절이었다.

잘하고 싶다면 '노력' 이란걸 당연히 해야 하지만 마음만으로 갑자기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매일매일이 전쟁터 같았던 기분이 들던 시절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그렇게 마음일 뿐이고 결국 그 어떤 일이든 잘하고 싶다면 성실해야 함은 당연한 기본값의 행동인 셈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잘하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으로 매일같이 메모하기 시작했다. 내 머리만을 믿지 않았고 내 행동에 어떤 식으로 태클을 걸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 행동들은 내가 나를 감시했던 선순환의 행동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된 건 그때부터 성실해져 보니 삶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잘하고 싶은 그 마음을 우리는 소질(素質)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작가는 잘하고 싶은 마음 자체를 소질(素質)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소질과는 별개로 어떤 나의 특별한 기질 덕분에 지금까지 그 긴 시간 동안 변함없이 글을 쓰는 행운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브런치 연재하기 얼마 전쯤에 나는 이제는 정말 글을 그만 써야 할 것 같다는 말을 친하게 지내는 지인과의 식사자리에서 또다시 진짜 마지막이라며 그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오랜 시간 나를 지켜봐 온 그녀는 어쩌면 속으로 "쟤 또 시작이네~~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때 내 말이 아무리 진심이었다 해도 그 말을 하던 그 순간과 그 공간에서의 나는 정말 절망적이었다. 더 이상 어떤 시도조차 안 하고 먼지처럼 사라지겠다는 그 어떤 결심은 돌이켜보면 사실 무명작가에게는 엄청난 특권이기도 했다. 어차피 내 글을 읽은 독자들도 적고 기대치가 적은데 내가 더 이상 한 걸음 안 나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할 만큼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뱉어낸 뒤, 얼마뒤에 나는 무슨 마음으로 노트북을 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 기도를 하고 새로운 브런치 원고를 연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제목을 정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 마음을 가장 결정적으로 돌린 것은 두 번 다시 글을 안 쓰겠다는 마음보다 더 컸던 것은 내 방 한쪽에 산처럼 쌓여있는 노트들 덕분이었다. 사실 글을 쓸 때도, 글을 고쳐 쓴다고 해도 내게 있어 글을 쓴다는 건 거의 매번 치유의 개념이기 때문에 그냥 술주정뱅이가 매일처럼 마시는 술(酒) 같은 것이었다. 마셔서 취해서 잊어버리고 잘 수 있는 그런 것이었는데.... 그렇게 쌓이고 쌓인 투명박스의 그 수 많은 노트들이 갑자기 내게 윙크하며 내게 한 번만 더 해 보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처음부터 어떤 목적이 앞선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먼저 지치고 투덜대고 있냐고 하면서 그러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다시 용기내어 신발끈을 묶고 운동장에 나와 달리기를 하겠다고 나온 선수처럼 그렇게 좌절하지 않고 준비하고 일어 설 수 있었다.

삶은 참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때 내가 갖었던 그 깊은 막막함과 서러움,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안 나와서 글을 안 쓰겠다는 것이 아닌 그냥 조용히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무존재감이 그땐 내겐 한없이 감싸안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서히 영문도 모른체 그렇게 주저앉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터널밖의 세상에서는 무지개와 햇살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때의 난 그저 잊히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터널을 지나고 나니 내가 어제 나쁜 악몽을 꾸었던 걸까? 싶은 그런 마음이 들 정도 그날의 어제와 오늘은 그렇게 다르게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 성실함이 주는 선물은 결국 어떤 포기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을 나는 가슴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 원고를 쓸 때마다 다음 주엔 이런 이야기를 써야지 하고 구상을 할 때마다 가장 절망스러워할 때 갖았던 그 힘든 마음들 앞에서 주저하지 않았던 나를 떠올리곤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잘했어.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었어."라고 말해주게 되겠지?


대문 사진 출처: 김윤식 사진작가. 체코 국립 발레단. 2019

부분 이미지 사진 출처: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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