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꿈이길 바랬으나 꿈이 아니다

이것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by 팔랑심

내 인생에서 가장 악몽 같은 순간 두세 개 중 하나는 두 번째 폐원할 무렵에 생긴 일이다.

내가 두 번째로 폐원한 병원은 10년간 서대문구에서 운영했던 봄산부인과다.

은평구의 병원을 폐원할 때 생각은 다시는 의사 하지 말고 다른 것으로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쉬면서 발리로 아내와 여행도 가고 내 인생에서 군 대체 복무 기간을 빼면 가장 한가하게 지낸 시간이었다. 물론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아야 할지 고민이 있어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의사가 의사 안 하면 도대체 무엇으로 먹고살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전문직도 비슷하겠지만 의사는 그야말로 의학 분야 아니면 다른 분야에 대하여는 완전 숙맥인 수가 많다. 그래서 의사 하다가 은퇴하고 사업을 벌인 사람 중에 성공한 사람이 거의 없다.


계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외래 진료가 끝난 토요일 오후였다.

봉직의로 있던 여선생님이 산전 진료를 하던 산모가 아침 일찍 진통이 있어 입원했는데 퇴근할 때까지도 출산을 못하고 있었다. 마침 그날 당직 근무이던 나는 산모를 인계받았는데 산모는 여러 시간의 진통으로 상당히 탈진된 상태였다. 두어 시간 정도 더 경과를 지켜보았지만 태아 머리가 질 쪽으로 하강하지 못하고 골반에 걸린 난산 케이스였다. 산모와 보호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아무래도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보호자는 더 기다려 보기를 원하였고 산모도 자연분만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계속 기다려도 진행이 더 이상 되지 않아 다시 한번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권하였다. 그러나 수술에 대한 동의를 받지 못하고 보호자와 산모는 흡입기를 이용한 분만이라도 해서 자연분만을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흡입기를 사용해도 자연분만이 어려운 사례였기 때문에 흡입기 사용에 따르는 위험을 충분히 설명하고 다시 한번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쪽으로 설득을 했다. 그러나 내 설득은 실패하였고 결국 흡입기를 이용한 분만에 돌입했다. 예상대로 아기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흡입기는 사용 시간이라든가 탈락 회수라든가 어느 범위 이상의 사용은 하지 않도록 교과서에서 권고하는 수준이 있다. 그러나 막상 흡입기를 사용하면 중간에 중단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아기가 골반 내로 진입이 되기도 하였고 수술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흡입기를 이용하여 바로 출산되는 것보다 위험성이 있다. 가까스로 흡입기로 아기는 분만을 하였으나 무리한 흡입기 사용으로 출산 직후에도 아기는 울지도 못하고 자발 호흡도 없었다. 인공호흡을 하면서 대학병원으로 이송하여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시켰다.

신생아 중환자실 복도에 몇 시간 동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것은 꿈이다. 이것은 꿈이어야만 한다.”

꿈이 아니라면 신께서 정말 한 번만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기가 아무 일 없이 회복될 수만 있다면 이전까지 한 번도 신을 믿어 본 적이 없지만 교회든 성당이든 절이든 열심히 다니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과 내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정상으로 회복되지 못하고 저산소증에 의한 중증 뇌성마비라는 장애를 안고 말았다. 그런 상태에서 아기는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매일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고 있었다.

출산하고 보름쯤인지 한 달쯤인지 정확히 일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쯤 지났을 때였다. 아기는 대학병원에서 최종적으로 회복 불가능 판정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퇴원했다고 들었다. 다음 날 산모의 남편이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왔다. 아기는 호흡도 하고 간간이 울기도 했지만 매우 미약했고 한쪽 머리는 저산소증의 영양 탓인지 크기가 작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어려워 보였다. 그 아기를 보는 내 마음도 참담했다.


남편은 이런 아기는 자신들이 키울 수 없다고 하면서 나보고 책임을 지라고 한다.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내가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남편은 자신들은 이런 아기는 키울 수가 없으니 나보고 아기를 죽여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싶은 마음은 들었지만 그런 일은 의사로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건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다.

남편은 며칠 후 다시 와서는 장애가 있는 아기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내가 아기를 키우면서 속죄하면서 살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고 남편의 말이 어쩌면 진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다. 설사 내가 아기를 키운다고 해도 정작 아기를 키우는 것은 내가 아니라 아내가 할 일이니 말이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가서 아내에게 물었다.


나: “그 아기 말이야. 오늘 보호자가 다시 왔어. 우리 보고 키우라고 하는 데 어떻게 하지?”

아내: “돈 바라고 하는 소리지 정말 그렇게 하라고 하겠어?”

나: “보호자 표정 봐서는 정말 그렇게 해 달라고 하는 것 같아.”

아내: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나: “우리가 그냥 키우면 안 될까? 보호자는 도저히 못 하겠대.”

잠시 생각하던 아내는 결국 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대답을 했다.

아내: “그럼 내가 키워줄게. 넷째 아이라고 생각하고 키워 줄테니까 정말 그럴 생각이면 친권 포기 각서 받아 가지고 와. 그래야 키울 수 있지.”

나: “알았어. 미안해.”


그 사건은 이미 15년도 더 지난 오래전 사고다.

그러나 이 일을 적는 지금도 그때의 순간들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가슴이 먹먹해온다. 병신 같은 원장, 참 못난 남편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아내의 약속을 받고 나는 남편에게 그런 내용을 전달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자 남편은 아기를 넘길 생각도 친권을 포기할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의 시간을 끈 후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배상액을 정하는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 일에 관하여는 주변에도 소문이 났고 배상금을 많이 받으려고 한 것인지 모르지만 외부에도 알려졌다.

병원 홈페이지에는 항의의 글과 비난의 글이 하루에도 수백 건씩 올라왔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괴로운 순간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듯싶다.

배상보험 회사의 손해 사정인의 중재로 결국 배상액이 정해졌고 합의를 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아기는 한 달쯤 지나서 짧은 삶을 마치고 저 세상으로 갔다고 들었다.


의료 분쟁이 발생하면 해결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서로 합의를 하거나 형사든 민사든 법의 판결을 받는 것이다. 법원의 중재로 조정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도 합의의 일종이다. 나의 경우는 당시 내가 가입했던 배상보험 회사의 중재로 합의를 하였다. 지금은 비슷한 사례에서 더 많은 배상액을 지불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 당시 나로서는 상당히 큰 액수인 2억 정도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를 했다. 내가 가입한 배상 보험 회사에서 반 정도 지불했고 나머지 반은 내가 은행에 대출을 받아서 지불했다.


이후 얼마 안 되어 나는 애증의 봄산부인과를 그만하기로 결정했다. 사고로 인한 두려움과 인터넷의 수많은 악플들이 뇌리에 떠 올라 더 이상 진료를 하기가 어려웠다. 누군지도 모르는 익명의 글이 홈페이지로 전화로 나를 괴롭혔다. 당시 그런 익명의 글 때문에 입은 상처로 나는 이후 인터넷에서 익명이나 필명은 쓰지 않았다. 좋은 글이든 나쁜 글이든 반드시 실명으로만 썼다. 비록 지금 팔랑심이라는 아이디로 활동을 하지만 내가 누군지는 이미 밝혀진 것으로 그 필명은 이름이나 마찬가지의 것이다.


막내딸이 울며 붙잡던 거실 TV까지 가져다 놓고 인테리어 하면서 하나하나 손때가 묻고 직접 만든 병원 로고도 여전히 현관문에 붙어 있지만 나는 이런 마음으로는 병원을 계속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와도 상의를 하여 내가 힘들어하니 그렇게 하자고 허락을 받았다. 첫 번째 폐원과 다른 것이라면 아내와 상의를 했다는 것, 그리고 병원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뿐이다. 남은 상처는 어느 것이 더 크다고 하기 어려웠다.

당시 봄산부인과는 3 명의 산부인과 의사와 1 명의 소아과 의사가 있는 중소 규모 병원으로 지역 내에서는 평판이 괜찮아서 월 분만 50건에서 60건 정도 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사실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나야 경영 능력이 떨어져 그 정도 분만을 하면서도 이익을 거의 남기지 못하였지만 분만 건수 그 정도면 상당히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점으로 하여 다행히 인수자를 만나서 약간의 권리금도 받고 병원을 넘겼다. 병원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고 원장만 바뀌었으니 엄밀한 의미에서는 폐원은 아니다.


그때의 폐원이 지금 되돌아보아 잘한 결정인지 아닌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 당시의 고통은 사실 적지 않아서 되돌아 가도 비슷하게 결정할 듯싶다.

지금도 난산으로 흡입기를 꺼낼 때면 그때 일이 생각나서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심장은 두근거린다.

원칙과 양심을 지키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최면은 어쩌면 나에게는 산부인과 의사를 그만두기 전까지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 인지도 모르겠다. 그로 인해 겪는 고통은 병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죽는 날이 오기 전까지 그 병으로부터 벗어나서 사는 기간이 다만 얼마라도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 실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그가 손목 동맥을 절단해 자살하기 얼마 전에 그렸다는 그림이다. 로스코의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그럼에도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바라보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작품을 보고 어지럼증, 감정의 폭발 등을 겪는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그의 그림을 보는 관람자들에게서 많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내가 그 그림을 그릴 때 겪은 것과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비극이나 무아경, 파멸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내 그림 앞에 설 때 힘없이 무너지고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은, 내가 그 기본적인 감정들을 전달했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로스코가 한 말이다.


-여기 실은 그림-

마크 로스코의 “무제 빨강 위의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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