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나는 두 번 병원을 폐원하고 세 번 개원을 했다.
첫 번째 폐원한 병원은 은평구에 개원했던 심상덕 산부인과고 두 번째 폐원한 병원은 서대문구에 개원했던 봄산부인과다.
그중 첫 번째 폐원은 기형아 검사와 관련된 일 때문이고 두 번째 폐원은 의료 분쟁과 관련된 일 때문이다. 첫 번째 폐원이나 두 번째 폐원이나 모두 내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그럼에도 폐원 전후 사정을 여기에 적는 것은 비록 내 개인적인 고통이지만 이것은 의료 시스템과도 관련이 없지 않고 또한 나의 지난 시절의 행동에 대한 반성도 담고 있다.
첫 번째 폐원은 벌써 20년도 더 된 8월 15일 광복절 연휴 기간 무렵이었다.
그해 여름은 30년 만의 폭염이라고 뉴스에서 떠들 정도로 아주 더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혼자 병원을 운영하던 나는 출산 산모가 언제 올지 몰라서 휴가를 가지는 못하고 아내 혼자서 세 아이들을 데리고 4박 5일로 서해안으로 휴가를 떠났다. 3일간의 연휴가 끝난 다음 날 아내가 오기 이틀 전이었다.
임신 4개월 정기 진료를 위해 방문한 임신부가 있었다. 초음파 검사가 끝나고 이제 검사실로 가서 기형아 검사 (당시는 트리플 마커 검사)를 하고 가시면 된다고 했더니 이미 보건소에서 검사를 했는데 이상이 없다고 하면서 할 필요 없으니 안 하겠다는 말했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 보건소에서 쿼드 마커 검사나 트리플 마커 검사를 무료로 해 주지만 당시에는 보건소에서 기형아 검사를 해주는 곳이 있기는 했지만 드물었다. 그래서 임신 중 기형아 검사든 초기 산전 검사든 임신 중의 검사는 거의 모두 병원에서 하는 검사로 생각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내가 개원하고 있던 그 무렵에는 지금 주로 하는 쿼드 마커 검사나 통합 검사는 없을 때였고 트리플 마커 검사가 쓰이고 있던 때였다.
기형아 검사인 트리플 마커 검사는 그 당시는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3 만원 내지 4 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초음파 검사 가격과 비슷한 정도라 그리 비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그런 비용이라도 아끼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의 대부분의 산모가 병원에서 권하는 검사를 아무 불만 없이 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그런 경우를 접하니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기분도 썩 좋지는 않았다. 우리 병원이 과잉 검사를 하는 병원도 아니었고 다른 병원에 비하여 오히려 비용이 저렴한 편이었다. 물론 산모는 보건소에서 검사해 주면 검사하고 결과지만 가지고 와도 되는 것인지 물어본 적도 없었다. 특히 기분이 안 좋았던 이유는 첫아기를 아주 심한 난산으로 우리 병원에서 출산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병원 같았으면 제왕절개로 출산했을만한 분인데 가능하면 자연분만을 돕는 철학에 따라 자연분만을 시도했다. 산모도 물론 고생을 했지만 나로서도 기억에 남을 만큼 힘든 난산으로 간신히 자연 분만을 한 분이었다. 그런 분이 불과 얼마 안 되는 검사를 굳이 병원에서 하지 않고 보건소에서 아무 말 없이 해 왔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정말 별 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아예 보건소에서 할 수 있는 검사는 해서 결과지만 가지고 오시라고 말씀드리고 있다. 여하튼 당시 그 산모를 진료하면서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러면 앞으로는 보건소에서 검사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시고 첫아기가 난산도 되고 하였으니 출산은 대학병원에서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였다. 말하자면 기형아 검사를 보건소에서 하였다고 병원에서 쫓겨난 셈이었다. 산모는 기분이 상해서 돌아갔고 몇 시간 후 산모의 남동생이라는 사람한테서 병원으로 전화가 왔다. 산전 관리하던 병원을 옮기라고 한 점 때문에 언쟁이 오고 갔고 산모의 남동생도 기분이 상해 막말을 했었다. 사기꾼이니 파렴치한이니 하는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을 들었다. 산모의 동생은 “당신처럼 돈이나 밝히는 의사는 병원을 그만두어야 한다.”라고 큰 소리를 냈고 나도 그런 산모를 보기 위해 땀을 흘릴 생각 없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나는 처음 개원했던 병원을 5년 만에 폐원했다. 당시의 월 분만은 20명에서 30명 정도로 지금보다는 분만 건수가 두배 정도 많았고 외래 진료 환자도 많아서 내가 개업한 30년 전 기간을 통틀어서 거의 유일하게 저축도 하던 시기였다. 그 일 때문에 두고두고 아내한테 구박을 받았다. 왜냐하면 폐원도 폐원이지만 그런 중요한 결정을 휴가를 간 아내와 상의도 하지 않고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폐원하기로 결정한 날 저녁에 휴가 간 아내에게 전화로 알려주었다. 생업인 병원을 닫은 것도 황당하겠지만 병원 3층에 살림집을 꾸려서 살고 있었으니 임대로 들어간 병원을 그만 두면 집도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러니까 하루아침에 생업과 살던 집이 없어지는 셈이었다. 아내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철이 없이 미숙하여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별일도 아닌 그런 검사 하나 때문에 그리고 사기꾼 의사라는 험한 말 한마디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내가 왜 그랬나 하는 것을 그 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검사 비용을 벌지 못하여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병원에서 하도록 권한 검사를 보건소에서 해 왔다는 사실로 하여 신뢰를 못 받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던 것, 그리고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사기꾼 혹은 칼 든 도둑놈이라는 소리를 견디기 어려운 것이 이유였다.
지금 나는 보건소에서 할 수 있는 검사는 모두 해서 오시라고 말씀을 드린다. 다른 병원에서는 보통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산모들은 보건소에서 무료로 검사를 할 수 있으니 득이라서 그렇게 하는 점도 있지만 사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런 사소한 검사 하나를 했느냐 안 했느냐를 가지고 의사에 대한 신뢰가 있고 없고 하는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 후 검사로 인하여 내가 기분을 상하는 일도 없었고 산모들도 검사를 보건소에서 해 오면서 눈치를 볼 일도 없어졌다.
그때 내가 임대하여 개원했던 병원은 3층 단독 건물에 1층은 외래 진료실과 검사실이 있었고 2층에는 입원실과 분만실, 수술실이 있고, 3층에 살림집이 있는 구조였다. 이미 산부인과로 운영하던 곳이라 간단히 천장과 벽도 일부 수리하고 도배를 다시 했는데 대략 일주일 정도 시일이 걸렸다. 그때 보수를 위해 왔던 인테리어 반장님이 공사 마무리하는 날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반장: "앞으로 병원 잘 되시면 좋겠습니다."
원장: "예 감사합니다. 공사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반장: "제가 아이가 하나 있는데 몇 년 전 아내가 이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원장: "아 그러세요? 인연이 있는 곳이군요. “
반장: "그때 진료하시던 전 원장님이 아내가 골반이 좁아서 절대 자연분만 못한다고 제왕절개 수술로 낳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원장: "네..."
반장: "수술하면 비용이 몇백만 원이 든다는데 그때 저희가 돈이 없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원장: "어떤 점 때문에 고민을….”
반장: "수술 비용 모아 둔 것이 없어서 지금 사는 전셋집을 빼서 보증금으로 수술비 내야 해야 하는데 그러면 가족이 길거리에 나 앉아야 하거든요."
원장: "고민스러웠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셨습니까?"
반장: "할 수 없이 그 당시 생긴 지 얼만 안 된 저 옆의 OO 병원으로 갔습니다."
원장: "다른 의사의 말도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다만 순산할 수 있는지 수술해야 하는지 여부를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긴 합니다.”
반장: "결국 그 병원에서 자연분만으로 낳았습니다."
원장: "그래요? 다행이네요."
반장: "아니 자연분만할 수 있는 걸 수술하자고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원장: "순산과 수술은 판단하기 쉽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반장: "그래서 이 병원이라면 치가 떨려서 공사도 안 오려했는데 뭐 그 원장이 하는 것이 아니라서 왔습니다."
원장: "예. 감사합니다. 덕분에 병원이 좀 환해졌네요."
반장: "원장님, 잘 되실 겁니다. 앞으로 저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 잊지 마시고 좋은 원장님 되시면 좋겠습니다.”
원장: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반장: “의사 선생님들이야 간단히 수술해야 한다고 한마디 하면 그뿐이겠지만 수술받는 사람은 그것에 가족 모두의 생계가 달려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원장: "예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서정주 시인은 시 “자화상"에서 그는 자신을 만든 것의 8할은 바람이라고 하였다. 시인을 만든 대부분은 바람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이런 짧은 말과 작은 사건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안에서 그대로 남아 있다. 내 모습의 어떤 부분들은 각각 어떤 사람에게는 존경스럽게 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불쾌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모습이든 모두 내 모습의 하나이고 그 모두가 모여 내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분명히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때의 폐원은 결코 잘한 일은 아니다. 어쩔 수 없어 감정의 폭발을 젊은 내가 감당할 수 없었더라도 나 혼자 결정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란 것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일은 내가 후회하는 숱하게 많은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후 아내는 휴가를 가면 전화로 항상 묻는다.
“병원 아무 일 없지?”
벨기에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는 해석의 여지가 많이 남긴 작품을 그린 화가다. 생애의 후반에 남긴 가면 그림으로 특히 유명하다.
“나는 가면이 지배하는 고독한 세계—온갖 폭력과 빛과 위엄의 세계—를 되도록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가면은 내게 신선한 색조, 과장된 표현, 화려한 장식, 예기치 않은 몸짓, 자유로운 움직임, 격렬한 소란을 의미한다.”
그가 가면이라는 주제의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고백이다. 물론 그가 어린 시절부터 골동품과 가면을 파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점도 있을 것이다.
-여기 실은 그림-
제임스 앙소르의 "가면을 쓴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