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남은 건 없지만 지기만 한싸움은 아니다

이것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by 팔랑심

-소제목-

P는 천재가 아니다


-내용-

P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2학년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갔다. 친구도 없어 혼자 기차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P가 잠시 화장실을 갔을 때 일이 벌어졌다. 사실 일이랄 것도 없이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것이 전부다. 기차의 좌석이 조금 모자랐는지 그때 일부 학생들은 서서 가거나 자리가 없이 바닥에 앉아서 가는 상황이었다. P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자리에는 학교에서 깡패로 알려진 학생이 앉아 있었다. 그 학생이 자리가 없어서 앉았던 것인지 아니면 이 자리 저 자리 자기 마음대로 골라가면서 앉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자기 자리에 엉뚱한 학생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본 P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 학생에게 다가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P가 한 말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나중에 P의 친구가 된 반 친구의 전언에 따르면 둘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P: “여기 네 자리야?”

그: ”아니”

잠시 침묵이 흐르다 P가 조용히 말했다.

P: “너 죽고 싶어?”

그: “…”


그 말은 들은 학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일어나서 다른 칸으로 갔다. 큰 싸움이 날 뻔한 상황이었지만 아니 한 번도 싸움을 해 본 적이 없는 P가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을만한 상황이었지만 상황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끝났다. P가 그저 자리 잠깐 빼앗은 학생에게 왜 그렇게 강한 말을 했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P의 친구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P는 성인 조폭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의 얼굴의 흉터가 그런 오해를 불러온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학창 시절 동안 P의 도시락을 건드린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건드려 봤자 먹을 만한 반찬도 없기도 했지만.


P가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성적표와 관련한 작은 소란도 있었다. P는 학창 시절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편이 아니었고 교실의 맨 뒤에 조용히 앉아 있는 편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은 고사하고 반에서도 한 번도 1등을 한 적이 없다.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모의고사를 치르고 성적표가 나온 날이다. 그동안 반에서 항상 2등을 하던 친구가 갑자기 3등으로 떨어졌다면서 누가 2등인지 찾느라 호들갑을 떨었다. 그 친구가 아무리 찾아도 2등을 한 학생을 찾을 수가 없었다. P는 친구가 없어 혼자 지냈지만 다른 아이들은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성적이 나오면 서로 묻고 알려주고 하던 때였다. 그렇게 자신을 앞지른 2등을 찾지 못하자 그 친구는 점심시간에 P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책상 서랍을 뒤져서 P의 성적표를 꺼내 보았다. 그리고는 P가 돌아왔을 때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그: “네가… 2등이야?”

P: “그런데?”

그: “너 맞아?”

P: “왜 뭐 잘못된 것 있어?”

그리고 교실 안은 아무 소리 없이 조용한 침묵만이 흘렀다.


-끝-


아직 잘 걷지 못하고 세 살 무렵 할머니 혼자 어린 나를 돌보던 어느 날 나는 툇마루 밑에 있던 뜨거운 밥솥에 엎어져서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다. 이후 몇 달간 흉이 덜 생기도록 어머니께서 매일 병원에 데리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러나 먹고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나중에는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했다. 결국 얼굴의 왼쪽 뺨에 크게 화상 흉터가 남았다.

내 나이 5,6살 무렵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에는 동네에 친구들도 좀 있어서 재미있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고 하면 사고가 나기 전은 기억에 없으니 제외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뛰놀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러나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 나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거리를 걸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내 얼굴을 한 번씩 흘깃 보고 지나갔다. 외모에 관심이 많은 사춘기 때는 그런 시선은 견디기 쉽지 않은 고통이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 오락실에서 하루 종일 게임만 하거나 책을 보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겔러그니 제비우스니 해서 당시 유행하던 게임은 거의 대부분 만랩을 찍었기 때문에 오락실 주인아저씨는 내가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한 50원쯤의 돈으로 하루 종일 오락실에서 살았다.


흉터는 고등학교 2학년 즈음 세브란스 병원에서 피부 이식 성형 수술을 받아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지금도 유심히 살펴보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만 상당히 진한 파운데이션을 바르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의사가 된 것은 그런 어린 시절의 사고와 그 이후에 성형 수술을 받을 때 보았던 흰가운을 입은 의사의 멋진 모습이 영향을 끼친 것일지 모른다. 어릴 때 내가 겪은 사고는 물론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로 인해 내가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금은 오래전처럼 흉터 때문에 죽을 만큼 괴롭지도 않다. 그저 아침에 화장할 때 눈에 띄지 않도록 파운데이션을 발라야 하기 때문에 조금 신경이 쓰이는 정도다. 이렇듯 어릴 때의 어떤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행로를 결정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내가 겪은 사고와 출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사고와 출산은 한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한 개인의 인생에 영향을 주고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흉터가 내 인생에 끼친 영향은 부정적인 것도 있고 긍정적인 것도 있다. 임신과 출산도 여성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기도 하고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 한다. 결혼을 제외하고는 평생에 한번 혹은 두 번쯤 겪게 되는 출산만큼 여성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도 없다. 결혼은 자신의 인생 무대에 혼자 있다가 둘이 되는 것이고, 출산은 둘에서 셋이 되는 일이다.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생기고 아가씨에서 아줌마로 호칭까지 바뀐다. 출산은 흉터를 남기는 사고와는 다르다. 모성애가 기득권 사회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서 만든 일종의 족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주 소수의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좋은 쪽으로 영향을 준다. 다만 충격의 강도로는 임신 출산도 어지간한 사고와 맞먹는 강도의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이 정설이다. 출산에 대하여 나는 희생보다는 희망에,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는 새 생명을 만난다는 두근거림에 방점을 찍으라고 말하고 싶다. 출산 시 겪는 통증도 사람에 따라 달라서 어떤 사람은 크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적게 느끼지만 거의 대부분 문제가 없는 통증이다. 산통으로 인한 통증이 있다고 해서 통증 쇼크가 오거나 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이겨낼 수 있는 통증이라는 의미다.


출산으로 인해 여성스러웠던 몸매도 잃고 혼자만이 누릴 수 있던 많은 시간들을 잃는다. 나만 생각하기에도 벅찬 세상에서 내가 지켜 주지 않으면 단 며칠도 살아낼 가능성이 별로 없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아기라는 이름의 존재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반면에 어머니만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명까지 대신 줄 수 있는 마음은 다른 경우들에서는 결코 가져 볼 수 없다. 어머니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의 일생”으로 번역되어 나온, 모파상의 소설 "어느 인생" 은 잠시의 낭만 뒤에 나머지 평생을 고단하게 살다 간 어느 여인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겁기만 한 것도, 그렇다고 그렇게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닌가 봐요."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행복하다 혹은 불행하다고 단정해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완전히 불행만으로 점철된 인생도 없고 그렇다고 행복만으로 똘똘 뭉친 인생도 없다. 불행한 사건을 많이 겪다 보면 아무래도 인생의 전반이 우울해질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모든 나쁜 사건이 다 불행한 인생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모파상이 소설 속에서는 애매하게 표현했지만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인생이란 비록 고단하기 짝이 없지만 항상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며 그럭저럭 한 번쯤 살아볼 만은 하다.”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는 여덟 살 때 거리에서 공을 가지고 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팔도 부러지고 크게 다쳤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 심심해할 아들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해부학 책인 그레이 아나토미 책을 사다 주었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전 세계의 의과대학생이 처음으로 배우는 해부학 강의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로 의과대학생에게는 성경과도 같은 의미를 가진 책이다. 그는 나중에 조직한 밴드의 이름도 그레이로 지었다고 할 정도로 그 책을 상당히 아끼고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에 해골이나 뼈 등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때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바스키아의 그림들은 다소 무섭게 보이고 거칠게 느껴지는 작품이 많다. "전사"도 그렇고 "자화상"도 그렇고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죽음을 담은 폭력"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어둡고 반항적이다. 어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가출을 일삼고 거리를 떠돌며 부랑아처럼 생활하던 것이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검은 피카소로 불릴 정도로 현대 회화에서 중요한 화가가 되었다. 여기 실은 그의 그림 "전사"는 험난한 세상에서 지지 말고 버티어 내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마약 중독으로 27살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러나 나는 그가 죽은 27살의 두배도 넘는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언제 죽어도 요절이라고 불릴 나이도 아니고 어떤 방식으로 죽어도 나름 치열하게 살다 갔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세월을 살았다. 물론 좋은 남편도 되지 못했고, 좋은 아빠 좋은 아들도 되지 못했다. 좋은 상사도 되지 못했고 좋은 친구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친절한 의사도, 능력 있는 원장도 되지 못했다. 그저 동네의 조그만 병원 의사가 된 것이 현재까지 내가 이룬 것의 전부다. 버나드 쇼처럼 임팩트 있게 짧게 묘비명을 남긴다면 나는 그렇게 남기고 싶다. “남은 건 없지만 지기만 한 싸움은 아니다.”



-여기 실은 그림-

장 미셸 바스키아의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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