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게을러서 가난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by 팔랑심

나는 가난한 의사다. 가난한 의사라니? 의사라면 다 외제차 타고 좋은 집에 살고 휴일이면 골프 치러 가거나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의사란 둥글둥글한 네모나 차갑지 않은 얼음처럼 허황된 말장난처럼 느껴질 듯하다. 연봉 상위 직업군에 성형외과 의사나 피부과 의사 등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체로 의사라는 직업과 가난은 그리 어울리지는 않는다.

내가 가난한 의사가 된 것은 주식 투자를 하거나 위험한 사업을 벌이거나 해서는 아니다. 의과 대학에 들어갈 때는 경제적인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나 보나 기대했는데 어쩌다 보니 가난한 의사가 되고 말았다. 특별히 게으르게 살지도 않았고 나름대로 산부인과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는데 모아 놓은 돈은 없고 대신 수억 원의 빚만 쌓였다. 의료 분쟁으로 지불한 배상금, 병원을 옮기면서 인테리어를 할 때 들어간 비용, 분만이 적은 탓에 생긴 경영 손실금 등 여러 이유로 빚이 생겼다. 죽기 전까지 빚을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갚더라도 짧은 시간 내에 갚지는 못할 것 같은 암울한 예감이 든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가난해지고 싶지는 않아서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 자존심 중에 하나가 밤에 응급으로 와서 잠깐 진찰을 받고 가는 산모의 경우 진찰비를 받지 않는 일이다. 나는 특별히 입원한 산모의 입원비를 할인해 주거나 분만 비용을 안 받는 일은 없다. 그러나 야간 응급 진료 시의 진찰 비용은 받지 않는다. 이 점은 개업하고 나서 일 년인가 지난 후부터 지금까지 30년째 유지하고 있는 방침이다. 그런 행동에 대하여 직원들은 밤에는 오히려 응급 진료를 하니 비용을 더 받아야 하는데 왜 받지 않고 그냥 가시도록 하는지 불만이 많다.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개업하고 나서 일 년인가 이년인가 되었을 때 겪었던 어떤 일 때문이다.


어느 날 예정일이 다된 산모가 밤 12시가 조금 넘어서 진통으로 병원을 방문하였다. 진찰을 하여 보니 너무 늦게 와서 아기 머리가 산도 아래까지 내려와서 곧 출산할 상황이었다. 허겁지겁 준비를 하여 다행히 아기와 산모 모두 별 탈 없이 출산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진통이 있었던 시간은 꽤 되었는데 밤 12시 전에 입원하면 하루치 입원료가 더 들어갈 것도 같고 혹시 병원에 갔다가 아직 입원할 때가 안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상황이 될까 봐 진통을 참았다가 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돈을 아끼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 산모를 보면서 돈이 없어서 위험한 지경에 빠지는 경우 모두를 내가 구할 수 없고 그럴 능력도 없지만 최소한 한밤중에 응급으로 우리 병원을 오는 산모가 돈 때문에 급한 진료도 못 받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밤에 응급으로 오는 진찰 산모는 돈을 받지 않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올 수 있도록 하는 취지로 그렇게 해 오고 있다.

비슷한 다른 사례는 아기 자세가 역아로 있는 산모였다. 역아는 의학 용어로는 둔위라고 하는데 엉덩이나 발이 골반 아래쪽으로 위치한 경우를 말한다. 정상적으로는 아기 머리가 골반쪽에 있다가 진통이 온다. 역아로 있으면 질식 분만 시도 시 아기의 어깨나 턱이 골반에 걸려서 빠져나오지 않는 경우가 잘 생기기 때문에 제왕절개로 출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출산 예정일은 1주 정도 남겨 두고 진통이 오기 전에 수술을 한다. 그때 내가 경험했던 산모는 역아였음에도 예정일까지 병원에 오지 않고 버티다가 진통이 시작되고서야 병원에 왔다. 진통이 오기 전에 미리 수술을 했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물으니 역아는 수술해야 한다고 듣기는 했지만 수술을 하면 입원 비용이 많이 들어서 자연분만을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한다. 진통이 시작되어서 분만이 임박해서 가면 수술을 하지 않고 자연분만을 도와주지 않겠나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산모는 이미 아기 다리가 질로 빠져나와 있어 제왕절개 수술을 하기는 늦은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질식 분만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역아의 자연 분만 시는 위에 말한 위험 외에도 출산 전에 탯줄이 질로 빠져나오는 제대 탈출이 생기기도 하며 그 경우 태아의 생명을 구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듯 역아의 질식 분만에는 출산 후유증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아무 후유증 없기 간절히 바라면서 역아의 출산을 시도하였다. 다행히 아기가 크지 않기도 하고 산모도 힘을 잘 주어서 무사히 질식 분만에 성공하였다.

너무 늦게 병원에 온 산모나 역아임에도 질식 분만을 시도했던 산모나 모두 경제적인 이유가 그런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두 경우 모두 운이 좋아서 산모와 아기는 건강했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출산에 있어 항상 좋은 운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아기의 생명을 운에 맡긴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돈 때문에 받아야 할 검사나 치료를 못 받거나 혹은 반대로 받지 않아도 될 검사나 치료를 돈 때문에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난한 모든 산모의 출산을 내가 모두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우리 병원을 오는 산모는 돈 때문에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잃지 말자는 뜻을 겸하여 야간 응급 진료 시 진료 비용은 받지 않는다. 물론 이런 내용을 직원들에게는 언제 한번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산모들은 잘 모른다. 요즘은 그런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는 많지 않기도 하고 설명하는 것도 번거로워서 하지 않는다. 그저 오래전 내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니 지키고 싶은 것뿐이다. 물론 우리 병원의 입원비가 다른 곳에 비하여 특히 싸거나 그렇지는 않다. 나는 우리나라의 현재 출산 관련 비용이 산모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부담스럽게 높은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출산 관련하여 드는 비용은 미국에 비하여는 1/10, 이웃 일본에 비하여는 1/3 정도 수준이다. 산부인과를 지원하는 의사가 적은 것은 일의 고됨도 고됨이지만 열악한 수준의 수입도 한몫을 한다. 출산을 돕는 의료 행위가 기본적으로 안고 있는 일의 고됨이나 위험성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단지 수입이 적어서 산부인과를 지원하는 의사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을 정책 당국자들이 방치하고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의사든 산모든 환자든 그 외 어떤 사람이든 가난하다는 것은 죄는 아니다. 따라서 벌을 받을 일도 아니다. 그러나 가난하다는 것은 불편한 상황이며 종종 가족에게 미안한 일이다. 십수 년 전 병원 경영이 어려워 유치원 다니는 막내딸의 피아노 학원을 끊었을 때 딸이 "아빠, 나중에 아빠 돈 벌면 나 피아노 학원 다시 다닐 수 있는 거지?" 하는 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병원을 이전 개원할 때는 인테리어와 장비 값을 아끼기 위해 집에 있던 큰 TV를 병원 로비에 가져다 두기로 했다. 그때 TV를 내주지 않으려고 붙들고 울던 아이의 눈물도 아직 잊지 못했다. 가난은 가정의 가장으로서, 부모의 자식으로서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사람이 살도록 하는 동인은 여러 가지다. 물론 아무런 삶의 목적이 없이 그저 죽지 못해 하루하루 산다는 사람도 있다. 나에게서 삶을 이끄는 동인은 과연 무엇일까? 그 동인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내 가난이 삶의 목표와 철학을 바꾸게 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오늘도 산다. 산모들이 임신 전 기간 동안의 여러 불편함과 출산 당시의 심한 진통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아기를 출산하고자 하는 목적을 바꾸지 않고 그 모든 것을 견디고 극복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내게는 산모들이 스승이다.


가난한 화가 하면 외국에서는 평생 그림을 한점 밖에 팔지 못한 화가 고흐를, 국내에서는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배 은박지에 많은 그림을 남긴 화가 이중섭을 꼽는다. 이중섭은 아는 시인의 시집 출판 기념회에 가서 방명록에 그림으로 대신 축의금을 냈다고 한다. 축의금을 낼 돈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화가가 축의금 대신 방명록에 남긴 그림은 "닭과 게"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게를 그린 이유는 배고프던 시절 게를 많이 잡아먹어서 미안해서 그랬다고 한다. 이중섭의 그림이 대체로 그렇듯 닭과 게도 어린아이들이 그린 것처럼 소박한 필치일 뿐 아니라 화풍도 순박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이중섭은 2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 수업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 때 아내와 아들들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을 모두 일본으로 보냈다. 그 후 혼자 국내에 머물면서 소와 같은 향토적인 주제나 가족과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남겼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혼자 고독 속에 살다가 가족과는 만나서 함께 살지 못하고 41세의 나이에 간질환과 정신병으로 적십자 병원에서 혼자 생을 마감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죽기 1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시회를 열었지만 대중의 관심을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그를 괴롭힌 것은 가난과 고독이었다.



-여기 실은 그림-

이중섭의 닭과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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