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병원 업무와 카메라는 별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성형외과와 피부과에서는 Before and After를 비교해 보기 위하여 환자의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겨 둔다. 내과에서 사용하는 위 내시경 혹은 대장 내시경에도 카메라가 달려 있다. 산부인과에서도 카메라가 사용된다. 자궁 입구의 병변을 자세히 보기 위한 질확대경 검사기에도 카메라가 달려 있다. 현미경으로 본 영상을 모니터를 통해 환자들께 보여주기 위하여 현미경에 부착하여 쓸 수 있는 카메라도 있다. 냉검사의 염증 세포나 움직이는 냉벌래, 혹은 칸디다 균을 직접 실제 모습으로 보여주면 치료 순응도가 훨씬 높다. 치료 순응도란 어떤 치료를 의사가 권했을 때 환자가 잘 따라서 치료를 받는 정도를 말한다. 치료 순응도가 높아야 치료 효과가 높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현미경에 부착해서 쓰는 카메라 혹은 CCD 모듈은 화질은 별로지만 비용이 다소 비싸다.
지금은 현장에서 필름 카메라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처럼 의료 영역에서도 아날로그 카메라는 요즘은 디지털카메라로 바뀌어서 해상도가 훨씬 좋아졌다. 물론 가격은 더 많이 비싸졌다.
카메라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생각나는 일이 있다. 필름 카메라가 주로 쓰이고 디지털카메라는 이제 막 개발되어 사용되던 무렵의 일이다. 카메라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디지털카메라가 부러웠지만 수백만 원도 넘는 고가품이라 선뜻 욕심을 내기 어려웠다. 몇 년이 지나니 디지털카메라가 대중화되면서 가격이 내려갔다. 성능에 비하여 가격이 여전히 비싸기는 했지만 일반인들도 욕심을 내볼만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때가 아마 군 의무 복무를 마치고 은평구에 처음 개원하고 몇 년 정도 지난 때일 것이다. 그때도 디지털카메라는 컴퓨터와 더불어 아주 비쌌지만 거금을 들여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기하는 진통 산모가 없어 한가한 어느 여름 저녁, 낮에 퇴원한 산모가 낸 입원비와 외래의 현금 수입으로 들어온 돈을 모두 편지 봉투에 담아서 남대문 카메라 상가에 갔다. 당시 내 마음에 든 카메라는 리코라는 회사의 제품으로 100만 화소였다. 1000만 화소도 넘는 카메라가 대다수인 지금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화질이나 기능이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고급 기종이었다. 당시 돈으로 80만 원인가 주고 샀던 기억이 난다. 아내는 그때는 병원의 접수일도 보고 수납도 챙기고 제왕절개 수술 때는 손이 바쁘면 수술을 돕기도 했다. 따라서 모든 지출은 아내가 도맡아서 했기 때문에 그날도 아내가 편지 봉투에 여유 있게 100만 원쯤의 돈을 가지고 갔었다. 나는 카메라를 고르고 아내에게 계산을 맡기고 나가려 하는데 아내가 돈을 지불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뭐해? 돈 내. 이걸로 사기로 했어."
"......"
"이거 산다니까."
"......"
아내의 반응이 없어 돌아보니 아내가 선채 눈물을 뚝뚝 흘린다. 다른 사람도 있는데 눈물이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정은 나중에 들어 보기로 하고 아내를 채근했다.
"왜 그래? 창피하게. 빨리 내고 가자."
나는 카메라 박스가 담긴 쇼핑백을 어깨에 걸쳐 메고 빨리 가서 찍어 보고 싶은 욕심에 마음이 급했다. 아내는 잠시 그렇게 서 있더니 나에게 봉투를 던지듯이 하고는 나가 버렸다. 할 수 없이 내가 카메라 값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왔다. 내가 비싼 것을 사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화가 났지만 참기로 했다. 평소에도 아내는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해서 백화점에도 잘 가지 않았지만 가도 누워 있는 옷만 사고 서 있는 옷은 사지 않는다고 했다. 아내의 말로는 서 있는 옷은 매장에 폼나게 걸려 있는 옷들로 대체로 비싼 옷이고 누워 있는 옷은 기획 상품으로 가격이 저렴한 것들이었다. 자기도 언젠가는 서있는 옷도 한번 입어 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사실 경제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서있는 옷도 간혹 사기는 한다
집에 돌아와서 왜 거기서 그렇게 사람 무안하게 그랬냐고 하면서 내가 화를 내니 아내는 그냥 눈물이 나서 그랬다고 한다. 내가 비싼 물건 사는 게 못 마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전날 분만으로 잠도 못 자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힘들게 고생해서 번 돈을 어이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한 순간에 허망하게 써 버리는 것이 너무 속상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아내의 눈에는 비싼 디지털카메라도 그저 플라스틱 장난감이거나 아내의 말마따나 예쁜 쓰레기로 보였을 것이다. 아내도 남편이 즐거운 마음으로 사서 기쁜 마음으로 사진도 찍고 하기를 바라서 간 것이었는데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울컥 났다는 것이다. 무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내게 말했던 것 같은데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그때는 그렇게 여리디 여린 감성을 가진 아내였는데 종 변환이 된 건지 능력이 없는 남편과 살다 보니 성격도 메마른 것인지 지금은 어지간한 일에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짠한 드라마를 보고 가슴 먹먹해하곤 한다. 슬픈 드라마를 보면서 눈가가 촉촉해지는 소녀 같은 아내가 그립다.
지금도 나는 카메라와 항상 가까이 지낸다. 퇴원하는 날, 아기와 산모, 남편 등 가족을 함께 찍어서 병원 홈페이지에 올려 드린다. 진통하고 출산하는 모습도 한 20분 정도의 길이의 동영상으로 퇴원하기 전날 USB에 담아 드리고 있다. 이 영상은 카메라로 찍을 때도 있고 휴대폰도 성능이 좋아서 휴대폰으로 찍을 때도 있다. 고프로라는 액션 카메라는 남편이 직접 들게 하여 아기의 모습을 찍는다. 찍은 출산 영상은 편집을 간단하게 하여 USB에 담아 드린다. 영상을 따로 보관하지 않고 폐기하기 때문에 퇴원하기 전에 잘 찍혔는지 여쭈어 보는 것도 일과의 하나다. 어떤 분들은 잘 보았다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시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무서워서 아직 못 봤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지 싶어 열심히 저장해서 드린다. 잘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아이가 속을 썩이면 약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힘들게 자신을 낳았다는 것을 알면 아이도 비뚤어지려던 순간에 한 번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살면서 마음이 많이 힘들 때 출산 영상을 보면 이렇게 힘들던 때도 잘 이겨냈는데 무언들 못 이겨낼까 하는 자신감이 생길 수도 있다.
"마침내 나는 마음대로 꿈꿀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실로 이것은 세계적인 아니 세기적인 발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 그럼 당신도 곧 그리운 이를 만나는 꿈을 꾸십시오. 그리운 이의 꿈을 사진 찍어 드릴 테니. 그 방법 - 당신이 있는 방 한구석에 종이 한 장과 만년필 한 개가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그 종이에 그 파란 잉크로 당신이 만나고 싶은 이와의 지난날의 추억의 한 토막을 써서 그걸 가슴속에 넣고 오늘 밤 편히 주무십시오. 내일 날이 밝으면 당신은 지난밤에 본 꿈과 꼭 같은 사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을 겁니다. "
강소천 님의 동화 "꿈을 찍는 사진관"에 나오는 문장이다. 동화 속 주인공은 노랑 저고리에 하늘빛 치마를 입고 있던 순이, 어릴 적 동무를 만나는 꿈을 꾸고 싶었다.
그러나 꿈을 찍어 주는 카메라는 없다. 그러나 카메라로든 글로든 그림으로든 우리는 추억을 남길 수 있다. 나는 출산 영상이나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어서 추억을 남겨 드린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은 내게 추억이 되어 아쉬움과 미안한 마음을 불러온다. 만일 꿈을 찍어 주는 화가가 있다면 아마 장욱진 화가가 가장 적격일 듯싶다.
장욱진 화가는 단순한 그림이 트레이드 마크다. 그림의 대상도 까치나 새, 나무처럼 소박한 것들 뿐이다. 그의 그림은 소재나 화풍에서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다정하고 단순하며 행복했던 분"
장욱진 화가의 장녀가 아버지를 표현한 말이다. 예수가 나고 자란 고향 마을인 나사렛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지지나 응원을 받지 못한 것에서 보듯 보통 자신을 잘 아는 지인이나 가족들에게 칭찬을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볼꼴 못 볼꼴 다 봤기 때문이다.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에서는 포장된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기 힘들다. 그럼에도 자녀에게 그런 평가를 받는다면 나름 잘 산 삶이라고 할만하다. 장욱진 화가는 도시가 싫어서 평생 숲의 있는 시골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림의 소재도 소박하다. 그림의 화풍도 그런 소재에 걸맞게 아이의 그림처럼 순수하다. 장욱진 화가는 스스로 행복한 삶이었다고 생각하고 자녀에게도 그렇게 보였지만 가장으로서 무능하다는 생각에 평생 가족에게 미안해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나는 행복하게 살지도 못하면서 가족에게 미안하게 산다.
-여기 실은 그림-
장욱진의 나무와 새와 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