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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May 04. 2024

화장실

복병

 아침 일찍 을지로로 향했다. 부동산 중개인 분께서 총 4개의 매물을 보여 준다고 말씀하셨다. 출근 전까지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매물이 을지로, 충무로에 퍼져 있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운명처럼 다가온 인쇄소 앞 매물을 첫 번째로 찾아 갔다. 을지로3가역에서 2분 정도 걸으니 도착했다. 역세권이라는 게 좋았다.


대로변에 있지 않고 좁은 골목에 위치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유동 인구가 너무 많은 곳은 고독과 몰입에 좋지 않아 보였다.


건물은 연식이 느껴지는 2층짜리 꼬마 상가였다. 낡긴 했지만 세월을 잘 머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2층에 올라가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계단을 오르니 좌측, 우측 그리고 전방에 하나씩 총 세 개의 호실이 있었다. 그중 우측 호실에서 건물주 분이 서점을 운영하고 계셨다. 건물주가 직접 사용하니 건물이 잘 관리되었겠구나 싶었다.


건물주를 이웃으로 두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인상이 선하시기도 했고 편하게 월세를 받는 선택지를 두고 직접 서점을 운영하는 분에겐 낭만이 있을 거라 멋대로 추측했다.


더더욱이 곁에 인쇄소와 서점이 있다니. 글을 쓰고 인쇄하고 책을 팔고, 그야말로 삼위일체 아닌가. 매물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이었지만 확신이 부풀어 올랐다.


매물은 건물주 분의 서점 맞은편에 있는 호실이었다. 1인 디자인 회사의 사무실로 쓰였다고 했다. 10평 정도의 공간으로 창도 이곳저곳에 나 있어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 출판전야가 들어서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기획서를 쓸 때 정리한 주요 요소들, 예를 들어 책장과 책상이 어디에 위치하면 좋을지 가늠해 봤다.


아직 이전 임차인의 짐이 남아 있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가 쉽지 않았지만 설렜다. 데이데이 팀에 보여 주기 위해 공간 내부 사진도 열심히 찍었다.

을지로 매물

금액 조건도 훌륭했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65만원. 간절히 바랐더니 딱 좋은 매물이 나를 찾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을 보기 전까지는.


다음 매물을 보러 가기 전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살폈다. 공용 화장실인 건 둘째치고 변기가 푸세식(재래식)이었다.


관리가 잘 되어 깨끗하긴 했다. 하지만 관리가 잘 되어도 푸세식은 푸세식이다. 나도 거부감이 드는데 출판전야에 올 손님들은 오죽할까.


옥의 티 수준이 아니었다. 화장실의 상태를 알면 오려던 사람도 안 올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보조 시설이라 생각한 화장실의 위력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고운 비단처럼 펼쳐쳤던 나의 꿈에 오물이 엎어진 느낌. 마음을 가득 채웠던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머릿속에 푸세식 화장실만 남았다.


나머지 매물에 희망을 걸었지만 다 성에 차지 않았다. 건물이 관리가 잘 되는지 보려면 화장실을 살피라는 한 건물 관리인 분의 말씀만 기억에 남았다.


을지로 매물 투어가 끝나고 부동산 중개인 님에게 미안했다. 돈 한 푼 드리지 않았는데 한 시간 동안 나를 끌고 이곳저곳을 다녀 주셨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매물을 구하는 일이 꼭 애인을 찾는 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99가지가 좋아도 1가지가 마음에 안 들면 도루묵이 될 수 있구나.


을지로를 다녀온 후 부동산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첫 번째 매물의 건물주 분이 화장실을 고쳐 준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도 화장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화장실 문제를 곱씹다 보니 더 깊게 들어가게 됐다.


푸세식 변기에서 시작한 고민은 공용 화장실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공용 화장실은 괜찮은가? 밤 늦게까지 이용하는 출판전야에서 위험하지 않으려나?


단순히 위생, 청결의 문제에서 화장실에 접근해서는 안 됐다. 출판전야는 혼자 사용하는 곳인 만큼 치안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했다.


화장실은 치안의 문제에서 가장 취약하게 드러난 곳이었다. 밤 늦은 시간 혼자 공유 화장실을 사용하면 무서울 것 같았다.


결국 출판전야의 화장실은 양변기를 갖춘 전용 화장실이 되어야 했다. 운명의 상대를 찾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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