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의 얼굴
서재의 중심은 책상이다.
책상은 서재의 문패와도 같다.
- 아무튼 서재, 김윤관
책상은 나의 모든 글들이 태어나는 심장이자 온 우주의 중심이므로 일단 책상의 위치가 정해져야 다른 가구들이 자리를 잡을 터였다.
- 자기만의 방으로, 안희연 외 9명
출판전야를 만들 때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건 책상이었다. 앞선 문장에서 얘기한 것처럼 책상은 서재의 얼굴과도 같은 가구이니까.
데이데이 팀과의 미팅 때도 책상이 정해져야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질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책상을 정하지 않으면 디자인을 시작할 수 없었다.
다행히 전부터 점찍어 놓은 책상이 있었다. 뉴도큐먼트라는 브랜드의 모션 데스크였다. 올블랙 디자인 덕에 세련되고 묵직해 보였다. New Document라는 이름도 마음에 들고.
부동산 계약을 하고 얼마 뒤 책상을 보러 양재에 있는 뉴도큐먼트 쇼룸에 갔다. 1600X800 사이즈의 검은색 모션 데스크가 창가에 놓여 있었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간결하면서도 만듦새가 좋은 책상이었다. 상판이 오르내리는 것도 부드럽고 소리도 점잖았다.
기대를 충족하는 책상이었지만 왜인지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아 이거다! 하고 꽂히는 느낌이 없었다.
책상 투어에 함께해 준 엄마와 누나에게도 책상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물었다. 다른 가구를 둘러보던 둘 모두 깔끔하네 정도의 심심한 답을 해 주었다. 큰 감흥이 없어 보여 의구심이 들었다. 이 책상이 과연 출판전야에서 중심을 잘 잡을 수 있을까.
손님이 출판전야에 들어왔을 때 이곳의 중심은 책상이구나하고 단번에 알아차리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책상이 필요했다.
한창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엄마가 옆에 와서 멋진 책상을 봤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를 따라가니 드넓은 상판을 자랑하는 나무 책상이 하나 있었다. 눈길이 중력에 이끌리듯 책상으로 향했다.
판매용은 아니고 쇼룸 직원 분이 업무를 볼 때 쓰는 책상이었다. 물어보니 쇼룸에서 직접 제작한 책상이라 하셨다. 모션 데스크도 아닌 데다가 살 수도 없는 책상 주위를 위성처럼 맴돌았다.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본 직원 분은 디자인을 고려하면 일반 책상이 낫다고 말씀해 주셨다. 모션 데스크가 주로 사무실 용으로 나오다 보니 아직까지는 디자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얘기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누나도 꼭 모션 데스크여야 하는지 물었다. 꼭 모션 데스크여야 하는가. 고민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모션 데스크를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손님이 자신의 체형에 맞게 책상 높이를 조절할 수 있기를 바랐다. 손님마다 체형이 다를 테니까.
내 생각을 듣고 누나는 높이 조절은 의자로 충분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직원 분과 누나의 얘기를 들으니 꼭 모션 데스크로 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결국 이 날에는 책상을 정하지 못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렌트프리 기간이 한 달이라 서둘러 책상을 정해야 했다. 이때부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책상을 살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책상을 찾았다. 책상에는 돈을 아끼지 않기로 결정한 만큼 하이엔드 브랜드, 빈티지 가구까지 후보로 삼았다.
자취 준비할 때는 들여다본 적도 없는 가구 편집샵들을 살폈다. 쿠션과 같은 소품이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100만 원을 훌쩍 넘겼다. 가격이 안 쓰여 있는 가구도 있었다.
평소라면 가격을 보고 바로 마음을 접었겠지만 출판전야를 하고 상황이 달라졌다. 실제로 구매할 수도 있으니 자세히 살피게 됐다.
가구 하나하나가 작품 같았다. 오랜 역사를 가진 가구가 많았고 지금은 대중화된 디자인의 원형이 된 가구도 있었다.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발굴한 작품임을 고려하면 비싼 가격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둘러보다 마음에 드는 책상을 발견하면 쇼룸에 찾아갔다. 수백, 수천에 이르는 금액대의 가구로 채워진 쇼룸. 예비 구매자로서 쫄지 않고 당당히 매장에 발을 들였다.
시선을 끄는 아름다운 가구들을 뒤로하고 책상을 보러 직행했다. 기대감보다는 이번엔 꼭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컸다. Artek, Vitra 등 다양한 브랜드의 책상을 봤다.
맨 처음 모션 데스크를 봤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멋진 책상들이었지만 확 느껴지는 무언가가 없었다. 이상형을 봤을 때의 확신이 들지 않았다.
모든 조건을 열고도 출판전야에 맞는 책상을 찾지 못했다. 데이데이에선 얼른 책상을 정해 주길 기다리고 있을 텐데. 무기한으로 알아볼 수는 없어서 그나마 마음에 든 책상 후보를 추렸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매장에 문의하니 다 재고가 없어 몇 달은 기다려야 했다.
결국 또다시 책상을 결정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갔다. 데이데이에 SOS를 보냈다. 마음에 드는 책상을 찾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데이데이 디자이너 분과 논의를 했고 책상을 주문 제작하기로 했다. 마음에 드는 책상이 시중에 없다면 직접 만드는 방법뿐이었다.
디자이너 분께서 어떤 책상을 원하는지 설명해달라고 하셨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책상을 보면 이상형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는 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려니 어려웠다.
디자이너 분께 전달할 수 있도록 나의 취향을 풀이하기로 했다. 나는 어떤 책상이 출판전야에 들어가길 원하는가.
우선 출판전야의 책상이 태양계의 태양처럼 구심점이 되길 바랐다. 시선은 물론 몸까지 끌어당길 정도의 인력을 가진 책상.
강력한 인력을 가지려면 무게감이 중요했고 자연스레 상판이 떠올랐다. 상판만큼 책상의 무게감을 좌우하는 요소가 있을까.
상판은 우리가 책상을 볼 때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다. 첫인상부터 책상의 무게감을 드러내려면 상판을 활용하는 게 좋아 보였다.
또 상판이 무거우면 자연스레 책상다리도 육중해진다. 상판의 무게를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두터운 다리도 책상의 중후함에 기여할 것이라 생각했다.
기능적인 부분도 신경써야 했다. 관상용으로 책상을 두는 건 아니니까. 작업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상이어야 했다.
노트북과 책을 여유롭게 올려둘 수 있을 정도로 상판이 넓은 게 기본이었다. 작업물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면 몰입이 잘 될 리 없을 테니까.
올려둘 것이 많지 않더라도 책상은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는 이야기를 유현준 교수님의 책에서 보기도 했다. 인간은 빈 공간에서 가능성을 찾아내기에 여백이 충분한 책상이 좋다는 얘기였다.
마지막으로 책상에 의미도 부여하고 싶었다. 직접 만드는 만큼 출판전야가 추구하는 가치를 책상에 녹이면 좋을 테니까.
이전에 바텐더라는 만화책을 읽다가 알게 된 바 테이블의 역사가 흥미로웠다. 손님의 근심을 잘 받쳐 주기 위해 바 테이블의 상판을 단단하고 두껍게 만든다는 이야기. 출판전야의 책상도 몽상가의 무거운 고민을 잘 받쳐 주길 바랐다.
결국 내 이상형의 조건은 상판으로 귀결되었다.
- 상판이 넓어야 할 것
- 상판이 두꺼워야 할 것
골조가 잡힌 후엔 살을 덧붙였다. 책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외관을 갖길 바라는지 설명과 레퍼런스를 정리했다. 짧게 요약하면 한국의 전통미가 드러나는 나무 책상이었다.
결론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 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요구사항이 많아 까다로웠을 텐데 디자이너 분께서는 다 받아 주셨다.
제작 발주를 넣을 때 디자이너 분께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책상이 서재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길 바란다고, 책상에서만큼은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얼마 후 디자이너 분께서 설계 의도와 함께 책상 설계도와 재료 샘플을 보내 주셨다. 설계도를 보고 샘플을 만지며 책상의 모습을 상상했다.
시중의 책상을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 책상이라면 출판전야에서 중심을 잡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상에 영혼이 담기길 바라며 이름을 지어 줬다.
천마행공(天馬行空)
천마가 하늘을 날듯, 구속감 없이 자유분방하게
천마행공과 함께 몽상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면 좋겠다.
책상이라는 첫 문장이 자리 잡으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큰 숙제를 끝낸 느낌. 하지만 쉴 틈은 없었다. 다음 문장을 이어서 써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