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자국
계약이 되고 건축 디자인 팀인 데이데이에 연락했다. 출판전야가 들어설 곳이 정해졌으니 본격적인 협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우선 현장을 보고 이야기하기로 했다. 사진과 영상을 보내드리긴 했으나 직접 보고 느끼는 게 가장 좋으니까. 마침 데이데이의 사무실도 뚝섬에 있어 디자이너 두 분과 함께 걸어서 현장으로 갔다.
눈이 펑펑 쏟아진 날이었다. 건물에 도착하니 계단에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한 계단, 한 계단 눈을 치우며 올라갔다.
가게 하는 사람들은 눈이 오면 제설 걱정부터 한다던데 눈이 반갑지 않은 날이 오려나. 출판전야를 찾아오다 눈길에 넘어지는 손님이 있으면 어떡하지.
쌓인 눈만큼 가게 주인의 책임도 무거워지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가게뿐만 아니라 가게까지 오는 길도 신경써야 했다.
4층 테라스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새하얀 백지 위로 첫걸음을 옮겼고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누군가 보기에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었다.
이제부터는 한 번도 밟아 본 적이 없는 땅을 누빈다. 함께 해 주는 데이데이 디자이너 분들 덕에 걱정보다는 설렘이 컸다.
디자이너 분들은 공간의 너비와 구조, 사방에 뚫린 창, 창문 프레임 색상 등을 보고 열띤 토의를 벌이셨다. 브레인스토밍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테라스로 나와 기다렸다.
잠시 후 디자이너 분들이 나오며 해가 진 후에 다시 와 봐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출판전야를 주로 이용하는 시간은 밤일 테니 그때 이곳이 어떤 모습일지도 살펴야 했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현장을 본 터라 디자이너 분들에게 출입문 열쇠를 맡겼다. 이 분들의 오감을 거쳐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기대하며.
며칠 뒤 데이데이에서 질문지를 보내 주셨다. 본격적인 설계에 들어가기 전 디자이너 분께서 진행하는 인터뷰 형식의 사전 조사였다. 질문들에서 출판전야뿐만 아니라 그걸 만드는 ‘나’에 대해서도 파악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출판전야에 대한 나와 데이데이 간의 이해도를 맞추는 랑데부 포인트인 만큼 성심성의껏 답했다. 인터뷰가 내게는 그간의 생각을 한 차례 갈무리하는 마침표였고, 디자이너 분에게는 출판전야 설계의 시작점이었다.
안녕하세요! 준우 님. ‘출판전야’는 어떤 곳인가요?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출판전야는 창작자를 위한 1인 예약제 서재예요. 자기 자신 그리고 작품에 오롯이 몰입할 수 있는 작업 환경을 제공해요. 마침표를 찍기까지의 긴 밤. 그 설레면서도 고된 시간을 함께 하는 곳이라 봐주시면 돼요.
‘출판전야’의 지리적 위치를 선정할 때 많은 고민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많은 곳을 둘러보셨을 텐데, 이 장소를 선정하신 결정적 이유가 있을까요?
이곳의 어떤 면이 특히 마음에 들었나요?
출판전야가 자리할 곳을 찾기 위해 몇 가지 기준을 세웠어요.
1) 창작자가 있는 지역이어야 할 것
- 창작자를 위한 장소라 그들의 문화가 깃든 지역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2) 주위에 산책할 만한 장소가 있어야 할 것
- 창작을 하다가 환기가 필요할 때 산책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3) 너무 외진 곳이 아니어야 할 것
- 늦은 시간까지 이용하는 곳인 만큼 치안이 중요했어요.
4) 인근에 주거 지역이 있어야 할 것
- 막차 걱정 없이 출판전야의 매력을 누릴 수 있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있기를 바랐어요.
망원과 뚝섬이 위의 조건을 충족한 최종 후보지였어요. 두 곳 위주로 알아봤는데 결국 뚝섬으로 정해졌죠.
망원은 금액 조건에 맞는 곳이 없었고 제가 사는 석촌과 너무 멀었어요. 출판전야를 직접 관리해야 하고 저도 사용해야 되니 거리가 중요하더라고요.
뚝섬은 석촌과 가깝고 마침 마음에 드는 매물도 있어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됐어요.
창작자가 많아 새로운 게 만들어지는 곳, 그러다 보니 산책하며 구경할 것도 많고 서울숲도 마음먹으면 갈 수 있는 곳, 역 근처이고 주위에 아파트 단지도 있어 유동/거주 인구가 있는 곳, 신축이라 깔끔한 것은 물론 채광이 좋고 전용 화장실도 있는 곳.
위에서 말한 조건을 충족하고 공간 자체의 매력도 풍부해서 매물을 보자마자 계약했어요.
요즘은 필요한 도구만 갖추어져 있다면 카페, 집, 하물며 공원에서도 작업할 수 있을 만큼 장소의 제약이 사라진 것 같아요. ‘출판전야’도 그 다양한 공간 중의 하나가 되겠죠.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다른 공간과는 어떤 차별적인 경험을 하게 될까요?
오롯이 혼자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어요. 몽상가는 물리적, 정신적 환경에서 차별적인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물리적 환경면에서 출판전야는 한 분의 몽상가에 맞춰 최고의 몰입 환경을 제공해요. 긴 시간 작업하기 좋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모니터가 있어요. 또 자신의 작업에 알맞은 음악을 틀 수 있는 스피커도 지원하죠. 이외에도 작업과 환기(리프레쉬)를 돕는 여러 가지 장치가 몽상가를 기다립니다.
정신적 환경면에서 출판전야는 고독에 빠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줘요. 고독은 창작의 원천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고독 속에서 몽상가는 자기 자신을 보다 깊게 들여다보게 돼요. 이 과정에서 길어낸 마음의 정수를 작품에 담기를 바라요.
이런 출판전야의 차별점이 몽상가가 마침표를 찍는 과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요.
마감 혹은 야간작업은 준우 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그리고 이곳에 머무르는 몽상가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어요. 창작 또한 마찬가지죠. 창작물이 세상에 나오기 전 우리는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요. 이때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밖으로 꺼내고 퇴고도 해야 하죠.
이런 일이 밤에만 이뤄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출판전야의 밤(夜)도 비유적인 의미이기도 하고요. 창작의 과정을 하루라 생각하면 마감 시간은 자정 전, 밤 시간이 될 테니까요.
그럼에도 출판전야에서 야간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가져요. 저는 몽상가 분들이 출판전야에 와서 자신의 영혼이 담긴 일을 하기를 바라요.
전업 예술가가 아닌 직장인에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주로 밤이 될 수밖에 없죠. 그전에는 회사 일을 해야 되니까요.
밤에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몽상가에게 야간작업 시간은 귀중하고 그만큼 소중히 다뤄져야 해요.
출판전야가 그 소중한 시간을 잘 품어 주면 좋겠어요.
‘출판전야’라는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 가장 우선되는 요소 세 가지는 무엇일까요?
추상적인 개념도 좋고 현실적인 물품이어도 좋아요.
키워드로 나누면 몰입, 환기, 흔적일 거예요.
우선 출판전야에 가면 몰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야 하고 그러려면 환경이 중요해요. 책상과 의자, 모니터와 스피커. 예산 우선순위에서 가장 앞에 있는 네 가지 물건이에요. 그 외 조명, 채광 등도 포함해서 공간의 지향성이 몰입에 맞춰지면 좋겠어요.
다음으론 작업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환기할 수 있어야 해요. 편안한 소파, 잠깐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책, 신선한 공기와 산책로. 이런 것들이 마음을 풀어 주면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거예요.
마지막으로 몽상가들의 흔적이 잘 남길 바라요. 여러 몽상가가 다녀가며 쌓이는 작품, 방명록이 출판전야에겐 중요한 자산이 될 거예요. 먼저 다녀간 몽상가의 흔적을 보고 나도 남기고 싶어라는 마음이 생기면 더할 나위 없겠죠.
준우 님에게 ‘출판전야’가 성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요.
성공한다는 것이 있을까요? 만약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출판전야에서 발생하는 수익만으로 출판전야가 운영되는 것. 그래서 사비를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 이걸 성공 기준으로 보고 있어요
이를 위해선 충분한 수의 몽상가가 출판전야의 매력을 알아보고 찾아와 주셔야겠죠. 1회 이용 비용이 7~8만 원이라 했을 때 적어도 한 달 중 15일은 예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출판전야’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어요.
‘창작, 고독, 몰입, 휴식, 환기, 완성..’
각각의 단어들에 대한 준우 님의 정의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세요.
1) 창작 : 자신의 취향과 영혼을 담아 무언가를 만드는 일
2) 고독 : 자신과 깊게 대화하는 일이자 혼자 있는 즐거움
- 어떤 책에서 본 정의도 인상 깊어 남겨요 : 고독은 혼자만의 시간을 우아하게 보내는 방법이자 사람에게 무언가를 안겨주는 시간
3) 몰입 : 우주에 나와 창작 대상만 남아 있는 무아지경의 상태
4) 휴식 :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녹이는 시간
5) 환기 : 창작의 바통을 잠시 무의식에 건네고 긴장된 의식을 풀어 주는 정신적 스트레칭
6) 완성 :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 정도의 상태
몽상가의 입장에서 ‘출판전야’를 어떤 이유에 ‘재’방문하였으면 하나요?
위에서 얘기한 차별점을 바탕으로 출판전야에 가면 확실하게 몰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좋겠어요. 깊은 몰입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가 되길 바라요.
지금으로부터 1년 후, ‘출판전야’는 어떤 모습일까요?
우선 출판전야가 금전적으로 자급자족하는 게 목표예요. 제 인건비는 바라지 않고 관리비, 월세와 같은 운영비가 서재의 수익만으로 충당이 되면 부담 없이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으로 출판전야에서 많은 창작물이 만들어지고 아카이빙 되면 좋겠어요. 출판전야에 모인 창작물을 보면 뿌듯할 거예요. 그것들을 보고 새로운 몽상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올 수도 있겠죠. 그분들이 또 창작물을 남기고. 이런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길 원해요.
또 출판전야의 지기(知己)가 더 생기면 좋겠어요. 제가 없을 때에도 출판전야가 돌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어요. 낮 시간에 출판전야에서 자신의 작업을 하다 저녁에 찾아올 몽상가를 맞이할 제2, 제3의 지기를 찾으려고 해요.
준우 님의 첫 오프라인 공간, ‘출판전야’를 시작으로 어떤 꿈을 꾸시나요?
대학 졸업하고 IT 서비스 기획자로 쭉 일해 왔어요.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스스로를 IT 서비스 기획자로 한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른 영역에서도 새로운 걸 만들면 좋겠다 생각했고 오프라인 공간이 그중 하나였죠. 공간은 우리와 아주 오랜 시간 함께 한 매체라 아늑하게 느껴지거든요. 누군가의 취향을 가장 잘 담아내는 매체이기도 하고요.
출판전야를 기점으로 제 취향을 드러내고 발전시켜 나가고 싶어요. 처음엔 부족한 부분이 많겠지만 잘 갈고닦아 언젠가는 취향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에요. 출판전야로 첫 발은 디뎠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