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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May 11. 2024

이상형

운명 같은 만남

중개인 분의 확신에 찬 제안에 뚝섬으로 향했다. 중개인 분은 역 앞에서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 딱 맞는 매물일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매물 찾기에 지쳐 있던 터라 여전히 회의감이 있었다. 마음에 들어도 가격 때문에 안 되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중개인 분의 뒤를 따랐다.


매물은 최근 리모델링된 건물의 탑층에 있다고 했다. 오래된 2층 빌라를 4층으로 증축하고 상가(근생)로 용도 변경한 건물이었다.


새단장한 건물을 보니 설렘의 불씨가 다시 지펴졌다. 붉은 벽돌 덕에 클래식하고 아늑하게 느껴지면서도 새 건물이라 깔끔했다. 기존 건물의 형태를 보존하며 새단장한 온고지신의 모습이 좋았다.


건물이 마음에 드니 찾아온 길도 돌아보게 됐다. 뚝섬역이랑 도보 5분 이내로 가깝지만 대로에 접하지 않아 조용했다. 근처에 성수, 서울숲도 있고.


기대되는 마음을 안고 4층에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라 걸어 올라가야 했다. 이 점이 단점보다는 장점으로 느껴졌다.


이푸 투안의 책 <공간과 장소>에서는 아래와 말이 나온다.

승객들은 좌석에 안전하게 벨트로 고정된 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수동적으로 운송됩니다.
(제트 여객기는) 그저 사치스러운 운반용 상자일 뿐입니다.


책에서는 여객기를 얘기했지만 엘리베이터도 운반용 상자와 다를 바 없었다. 엘리베이터 또한 주위 환경이 바뀌는 과정을 생략한다.


몽상가가 수동적으로 출판전야에 옮겨지길 원하지 않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센이 직접 '터널'을 지났던 것처럼, 몽상가 또한 이세계로 전이하는 과정을 온전히 경험하길 바랐다.


계단은 '터널'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오르는 행위는 일상을 의미하는 지상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층계를 오르며 눈높이와 주변의 풍경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


디지털 경험(엘리베이터)은 편리하지만 아날로그(계단) 경험만큼의 설득력은 없을 테니까.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올랐지만 여행처럼 느껴졌다.


4층에 도착하니 조그만 앞마당이 붙어 있는 매물이 보였다. 한 층을 혼자 쓸 수 있는 것도 좋은데 앞마당까지 있다니. 상상도 못한 옵션이었다.


또 탑층이라 공용 옥상을 편히 오갈 수 있었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는 터라 전망이 탁 트여 글쓰다 기분 전환하기 좋아 보였다.


이때부터 반쯤 홀린 상태로 매물을 살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8평 내외의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쓰기 딱 알맞은 크기였다.


신축이라 깔끔한 건 물론이고 창도 여기저기 크게 나 있어서 개방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건 실내에 개인 화장실이 있다는 점이었다.


나의 이상형이 실존하다니. 내가 고민한 부분을 한 큐에 해결해 주는 매물이었다. 중개인 분이 확신을 갖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금액 조건이었다. 보증금/월세가 내가 말한 조건인 1,500만원/100만원을 넘긴다고 했는데 차액이 얼마나 될까. 매물을 직접 보니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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