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정점
독립출판을 한 적이 있다. 한 번은 SF소설, 한 번은 에세이. 내 글을 책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이때도 손에 잡히는, 물성 있는 창작물에 욕심이 있었다.
만드는 김에 제대로 만들자고 욕심을 냈다. 문장 하나하나 줄 나뉨에 신경써서 편집하고 종이의 재질과 사이즈 그리고 폰트도 여러 책을 참고하여 골랐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욕심대로 되지 않는 게 있었는데 바로 표지였다. 내 손으로는 내 눈에 차는 결과물을 만들 수 없었다.
마지막 퍼즐인 표지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중 하선이가 떠올랐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멋진 친구였다.
하선 작가의 작품을 둘러보며 내 글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며칠간 고민하다 조심스레 표지를 그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갑작스런 요청이었는데 하선 작가는 재밌겠다는 말과 함께 부탁에 응해 줬다. 글과 어우러지는 작품을 그리기 위해 내 글을 끝까지 읽어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하선 작가와 두 권의 책을 만들었다. 하선 작가의 그림 때문에라도 책에 소장 가치가 있다고 친구들에게 농담하기도 했다.
하선 작가는 그 뒤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최근에 전시도 열었다. 회사 동기들과 전시회에 가서 작가에게 직접 도슨트를 받는 영광도 누렸다.
시간이 흐르며 달라지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보는 게 즐거웠고 작품도 아름다웠다. 한지 위에서 거친 붓질과 세심한 점묘가 어우러져 색다른 매력을 자아냈다.
전통에 새로운 시도가 가미된 작품을 보며 출판전야가 떠올랐다. 사랑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출판전야에 하선 작가의 작품을 걸고 싶었다.
물론 서재에 기능적으로 필요한 것만 넣기로 다짐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이어야만 서재에 들이겠다고.
하선 작가의 작품은 이 원칙 위에 서 있었다.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독립출판했을 때의 기억이 더해져서일 것이다.
하선 작가의 작품이 내 글뿐만 아니라 서재에도 함께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선 작가에게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 후 하선 작가가 뜻밖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출판전야와 어울리는 그림을 선물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내가 전시에서 보고 반한 작품이었다.
하선 작가는 한지 위에 그려진 밝은 달이 출판전야에서 몰입하는 몽상가 같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에 전야(前夜)라는 이름도 새로 지어줬다.
출판전야에 이보다 귀한 선물이 있을까. 전야(前夜)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실용의 차원을 초월한 선물이었다.
전야(前夜)가 출판전야에 걸린 모습을 상상했다. 화룡정점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출판전야의 가치를 머금고 있는, 서재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품이었다.
양재의 한 카페에서 전야(前夜) 전달식이 있었다. 받기 전부터 손에 땀이 났다. 마치 출판전야의 심장을 건네받는 듯한 느낌.
고고한 묵색 액자에 모셔진 전야(前夜)와 정성이 담긴 하선 작가의 편지. 감사함에 어쩔 줄 몰라 말문이 막혔다. 편지에 쓰인 말은 잊을 수 없다.
마침 출판전야의 공사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전야(前夜)를 들고 화룡정점을 찍으러 서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