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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May 25. 2024

서예

두 작가

하선 작가의 선물은 전야(前夜)에 그치지 않았다. 하선 작가는 전야만큼 중요한 글자를 출판전야에 남겨 주었다.


소미 작가 님과 미팅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하선 작가가 떠올랐다. 하선 작가에게 한지 블라인드에 올라갈 서예를 부탁하고 싶었다.


당시 하선 작가는 한지와 붓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한 번은 붓을 구경하러 같이 인사동에 구경간 적도 있다. 서예도 한지와 붓을 사용하는 예술이니 좋아하지 않을까라는 1차원적인 생각을 했다.

인사동 투어

하선 작가에게 붓글씨를 쓸 줄 아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다행히 하선 작가는 평소 붓글씨를 배우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때다 싶어 한지 블라인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서예가 필요한 이유까지 우다다 풀었다. 마지막엔 하선 작가에게 서예를 부탁하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선 작가는 처음이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면서도 이내 도전해 보겠다고 답했다. 이렇게 하선 작가와 소미 작가 님의 비대면 합작이 시작되었다.


한지 블라인드 위에 올라가는 서예였기에 소미 작가 님이 재료와 규격을 정해 주셨다. 세로 길이 15cm 정도의 화선지에 한자를 쓰기로 했다.


화선지에 올라갈 한자는 고민할 것 없이 명창정궤(明窓淨几)였다. 하선 작가에게 성어의 뜻을 말해 주니 마음에 들어 했다. 쓰는 맛이 있겠다 싶어 다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선 작가는 유튜브에서 서예 영상을 보고 인사동에 가서 세필붓과 한지를 샀다. 누군가가 느닷없이 부탁한 일에 그렇게 단숨에 몰입하기 쉽지 않을 텐데 감사했다.

서예 재료

소미 작가 님은 화선지를 한지 블라인드에 붙이는, 이른바 배접 작업이 실패할 수 있어 여분의 서예를 요청하셨다. 주어진 작업 시간이 일주일 안팎이었기에 하선 작가에게 부담이 될 수 있었다.


하선 작가가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고 근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재료가 갖춰지자 하선 작가는 서예 삼매경에 빠졌다. 여분을 넘어 다양한 버전으로 명창정궤를 써서 보여 줬다.

명창정궤(明窓淨几)

행복하면서도 난감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다 마음에 들어서 하나를 고르기 어려웠다. 자세히 볼수록 각각의 서예가 가진 매력이 묵이 퍼지듯 마음을 물들였다.


필체, 끝부분이 삐친 모양, 획의 굵기에 따라 풍기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한지 블라인드에 올라갔을 때 어떤 게 더 어울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데이터가 부족해서겠다 싶어 결국 두 작가 님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둘 모두에게 선택받은 아이 중에 고르자.


며칠 뒤 하선 작가에게 최종 작업물을 받았다. 두 손으로 모시듯 받들었다. 그다음엔 테이블 위에 하나하나 질서정연하게 올려놓았다.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매력이 있었다. 은은한 화선지의 문양에 먹이 스며든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촉감이 보드라워 검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쓰다듬기도 했다.



하선 작가는 마음에 드는 순서를 매겨 줬다. 1순위부터 앞에 오도록 포개서 봉투 안에 넣고 혹시나 구겨질까 두툼한 책 안에 끼워 넣었다.


다음 날 서예를 갖고 소미 작가 님의 작업실에 찾아갔다. 마침 작업실에선 출판전야에 들어갈 한지 블라인드가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광활한 스틸 작업대 위에 순백의 한지 블라인드가 펼쳐져 있었다. 두 팔을 벌리고 하선 작가의 서예를 품을 준비를 하는 듯했다.


소미 작가님이 하선 작가의 서예를 한지 블라인드에 대 보았다. 마지막 퍼즐 조각을 채워 넣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예의 분위기와 크기가 한지 블라인드에 알맞았다.

두 작가의 만남

두 개의 한지 블라인드 중 하나에만 배접을 하기로 했는데 계획을 바꿨다. 둘 모두에 하선 작가의 서예를 올리기로 했다. 하선 작가가 여분 이상으로 글자를 써 준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미 작가 님의 의견까지 보태져 배접 될 아이들이 정해졌다. 남은 아이들은 내가 따로 간직하기로 했다. 그 자체로 작품이니까.


배접이 마무리되면 다음 차례는 염색이라 했다. 두 작가의 작품이 한 몸이 되어 하나의 색으로 물들여지는 시간. 다음에 만났을 땐 어떤 모습일지 그리며 소미 작가 님의 작업실을 떠났다.

명창정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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