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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May 25. 2024

다름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사가 빨리 끝나야 오픈 일자도 당겨지기에 가쁜 호흡으로 작업이 진행됐다. 현장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다.


응원하는 마음에 작업자 분들께 달달한 간식과 음료를 사가기도 했다.


공사가 시작된 후에도 크고 작은 의사결정이 이어졌다. 콘센트나 CCTV의 위치, 서재에 비치할 지류의 재질과 규격, 콘텐츠의 내용과 폰트 등 정할 게 많았다.


여러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고르는 순간을 거듭했다.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기에 진득이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결정을 내리면 빠르면 그 자리에서 뚝딱, 늦어도 수일 안에 반영되었다.


2년 넘게 출판전야에 대해 고민한 스스로에게 고마웠다. 출판전야 인스타그램, 홈페이지에 남긴 기록들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할 때 도움이 됐다.


거듭된 선택을 거쳐 출판전야는 더 이상 머릿속에만 있지 않고 내가 책임져야 할 실체로 거듭났다. 성수동 1가 8-33 4층에 위치한 고독의 서재로.


상가 계약을 하고 공사가 마무리되기까지의 두 달, 그야말로 실전의 시간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허우적거리며 농축된 경험을 했다.


IT 서비스 기획자로 일해서인지 오프라인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기획의 의미


이미 시장에 비슷한 제품이 있는데 차별점이 뭔가요? 온라인 서비스를 기획할 때 자주 듣는 말이다. 차별점을 갖추지 못하면 기획은 의미를 잃는다.


이 점은 오프라인 기획도 마찬가지겠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 바로 따져야 할 시장의 범위다.


일반적으로 온라인 서비스는 좁게는 국가, 넓게는 전 세계를 단위로 사용된다. 물리적으로 어떤 지역에서든 접근이 가능하다는 특징 때문이다.


뛰어난 접근성은 기획자 입장에선 기회이면서도 고난이다. 경쟁 무대가 넓기에 웬만한 수준으론 고객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 선택받기 위해선 지구촌에서 가장 빠르거나 매력적이어야 한다.


시장 조사를 하며 내 기획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존재 의미가 있을까라는 회의감에 빠진 적이 많다. 세계는 넓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들이 다 경쟁자다.


오프라인 기획은 달랐다. 시장 조사를 이르는 말부터가 '상권' 분석이다. 오프라인 사업은 어느 정도의 물리적인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고객은 주어진 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곳만 선택할 수 있다.


석촌동의 카페 사장은 밀라노의 카페 사장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 석촌동 주민이 일상적으로 밀라노에 가서 커피를 마시긴 어렵기 때문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혹은 한국에서 가장 잘하지 않더라도 고객에게 선택받을 수 있다. 혹시 모른다. 그렇게 동네 주민의 지지로 사업이 이어져 언젠가 세계 제일의 바리스타가 될지도.


출판전야를 만들며 이 점을 체감했다. 공사가 시작되고 데이데이에서 한 장소를 공유해 줬다. 코너룸이라는 이름의 작업실이었다.


네이버에서 예약해서 사용할 수 있는 서재였다. 혼자 사용하는 예약형 서재라는 점에서 출판전야와 비슷했다.


처음엔 뜨헉하고 놀랐는데 이내 인천시 동구에 있다는 소개를 보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우리는 서재라는 비슷한 일을 하지만 서로 다른 동네에 있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 의미를 침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독을 즐기는 문화를 함께 확산하는 동지였다. 뚝섬은 멀고 인천은 가까운 누군가에게도 고독을 즐길 장소가 필요할 테니까.


앱을 만드는 중이었다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친밀감보다는 긴장감이 흘렀겠지.


휴먼 스케일이라는 말이 있다.

휴먼 스케일
인간 신체의 감각이나 움직임, 체격을 기준으로 한 공간이나 물체의 크기

- 대한건축학회 건축용어사전


나에게 온라인 기획은 휴먼 스케일을 벗어난 일이다. 내가 실질적으로 접하지 않은 세상까지 고려해야 하는 점이 때론 버겁다.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분들에게 가치를 전달하고 인정받는 오프라인 기획 일이 내게 알맞지 않나 싶다. 골목길을 걸을 때처럼 안락하다.




Starting Point


출판전야 기획서를 준비할 때 핀터레스트에서 레퍼런스가 될 만한 이미지를 찾았다. 내 머릿속 서재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 예시가 필요했다.


차분하고 고요한 밤의 서재에는 아무래도 명도가 낮은 색이 어울릴 것 같았다. 먹물을 머금은 듯한 목재로 만들어진 마루와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모으니 어두운 분위기의 무드 보드가 나왔다. 공간계에 다크 모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데이 디자이너 분들이 처음 기획서를 봤을 땐 아직 출판전야가 들어설 공간을 찾기 전이었다. 요구사항은 이해했고 매물이 구해지면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상가 계약을 마무리 짓고 디자이너 분들과 함께 현장을 찾았다. 디자이너 분들은 현장을 둘러보며 조금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셨다.


걸리는 건 동서남북으로 크게 난 창과 오크색의 창문 프레임이었다. 둘 모두 그 자체로는 참 좋았다. 사방으로 뚫린 창 덕에 개방감이 생기고 창문 프레임도 질 좋은 나무를 쓴 것 같았다.

창과 창문 프레임

문제는 현장의 분위기가 내가 준비한 출판전야의 레퍼런스와 매치가 안 된다는 점이었다. 다크 모드가 되기엔 빛이 많이 들고 창문 프레임의 색도 밝았다.


레퍼런스대로 구현하려면 난관이 많았다. 과한 빛은 한지 블라인드로 해결한다고 해도 프레임의 존재감은 쉽게 가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크색 나무 프레임이 현장 여기저기서 보였다.


모든 프레임을 어두운 색으로 덧칠하려다 그만두었다. 자연스럽지 않을 것 같다는 디자이너 분들의 의견이 있었다. 내심 아쉬웠지만 디자이너 분들의 경험을 믿기로 했다.


다크 모드 레퍼런스는 내려놓고 공간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을 잡았다. 프레임의 오크색과 잘 어우러질 수 있는 톤앤매너를 찾았다.

톤앤매너 잡기

진행하며 오히려 백지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내가 상상한 레퍼런스의 범위 안에서 결과물이 나왔을 테니까.


우리를 난감하게 한 공간의 특징은 오히려 출판전야의 DNA가 되었다. 창과 창문 프레임 덕에 출판전야만의 고유한 매력이 생겼다.


온라인 기획에선 접하기 어려운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앱 서비스를 만들 땐 보통 제로에서 시작한다. 앱의 디자인을 어떻게 가져갈지, 어떤 방식으로 개발할지 비교적 제약이 없다.


오프라인 기획은 가게가 뿌리내릴 지반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가게가 들어설 건물은 물론 동네 이웃까지. 통제하기 어려운 요소에 가게의 중요한 부분이 결정되곤 한다.


이런 특징에 일이 복잡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예상외로 좋게 풀릴 때도 많다. 가게 본연의 개성이 사는 것은 물론 내 가게의 부족한 점을 이웃이 채워 주기도 한다.


한 여름에 아이스커피가 땡기는 손님은 역 근처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해 온다. 작업하면서 먹을 끼니를 같은 건물의 포케집에서 포장해 온다.


동네 안에서 알게 모르게 서로 돕는 관계가 생긴다. 오프라인 기획을 잘하는 사람은 이런 관계 인프라를 잘 활용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서촌유희라는 한옥스테이 브랜드는 서촌이라는 동네의 인프라를 활용해 수평적 호텔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웃한 디저트 카페, 책방 등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알찬 휴식 경험을 선사한다.


내향인이라 아직까진 고독한 미식가처럼 출판전야 주위의 괜찮은 맛집, 카페를 찾아다니는 정도다. 언젠가는 용기를 내서 저희 손님들이 여기 많이 들르시더라고요라는 말을 건네고 싶다.




Cntl + Z의 비용


출판전야를 준비하며 집을 짓고 나면 10년은 늙는다라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실제로 지인들에게 갑자기 왜 이렇게 수척해졌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 돈 수천만 원이 걸린 의사결정을 내렸다. 선택을 하기 전엔 고민이 되어서, 선택을 한 후엔 확신이 안 생겨서 밤을 지새웠다.


온라인 기획에서는 흔한 '실행 취소'라는 개념이 오프라인 기획에선 생소하다. 이 점이 결정을 더 까다롭게 만든다.


예를 들어 앱에서 어떤 버튼의 색깔을 정할 때 다양한 색을 시도해 볼 수 있다. 파란색을 넣어 보고 마음에 안 들면 Cntl + Z(실행 취소 단축키)를 누르면 그만이다.


심지어는 어떤 기능이 배포된 후에도 반응이 안 좋으면 이전 버전으로 되돌리는 롤백도 가능하다. 권장되지는 않지만 하려면 할 수 있는 조치다.


오프라인 기획은 한 번 실행된 걸 취소하려면 더 큰 실행이 필요하다. 원상 복구가 불가한 경우도 흔하다.


한 번 깔린 마루는 다시 뜯어내기 어렵고, 한 번 칠해진 벽은 덧칠만 가능할 뿐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지 못한다. 결정에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 건 내 머릿속에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어느 정도의 크기, 어떤 색과 소재가 출판전야에 어울릴지 상상했는데 잘 그려지지 않았다.


부족한 경험을 채워 준 건 데이데이 팀이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디자이너 분들에게 의견을 여쭤볼 때가 많았다. 스피커 색은 블랙과 실버 중 뭐가 좋을까요, 이 조명은 어떤가요 하는 식으로.


다행히 값비싼 시행착오를 몇 차례 거치니 조금은 감을 잡았다. 출판전야에 어울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일이 전보다 수월해졌다.


이렇게 뿌리를 뻗어나가는 감각이 왠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많은 돈과 정신력이 들어가서이지 않을까.




지구야 미안해


공사 현장에 갈 때마다 그날 사용될 재료가 건물 앞에 잔뜩 쌓여 있었다. 주로 합판이 많았는데 하나하나 크기가 사람만 해서 4층까지 들고 나르기 쉽지 않아 보였다.


4층 테라스로 옮겨진 합판은 절단기로 가공되어 현장 작업에 사용되었다. 책장, 선반, 평상을 모두 맞춤으로 만들어 합판이 쓰일 곳이 많았다.


공사 현장을 보며 내가 벌인 사업으로 잘려나가는 나무가 있겠구나 생각을 했다. 당연한 일인데 두 눈으로 실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와닿지 않았다.


가상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온라인 기획과 달리 오프라인 기획은 지구상에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어떤 물질을 자원화하여 소모하는 작업을 수반한다.


그뿐이랴. 공사에 따라 배출되는 폐기물의 양도 만만치 않다. 공간 내 구조물이나 가구를 철거해야 하는 경우라면 문제는 더 심하다.


폐기물 문제는 팝업 전쟁이 한창인 성수 거리를 걸으며 실감했다.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자비한 철거와 화려한 단장이 반복되었다.


팝업 스토어의 가구, 소품 그리고 장식은 행사가 끝나면 어떻게 될까. 브랜드와 팝업 공간에 맞춰 가공된 물건들이 얼마나 재활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출판전야는 팝업 스토어는 아니지만 이러한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서재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가구가 맞춤이라 다른 곳에서 재활용할 수 없다.


언젠가 출판전야를 그만두는 날이 오면 맞춤 가구들을 뜯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대부분 폐기물이 되어 세상을 떠돌겠지.


이런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한 서점의 사장님은 맞춤 가구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서점이 들어설 공간과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자 하는 자세가 멋지다.


출판전야를 준비하며 건축가들이 쓴 에세이를 여럿 읽었다. 모두 환경 보전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는데 읽을 당시엔 요새 환경 보호가 중요한 토픽이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공사가 시작되니 건축가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들이 환경 보전에 대해 역설한 이유가 있었다. 8평 내외의 공간을 공사하는 일에도 죄책감이 드는데 하나의 건축물을 만드는 일은 오죽할까.


지구에 신세를 진 만큼 출판전야를 더욱더 오래 운영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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