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주
현장 공사가 끝나고 일주일 간 휴가를 냈다. 서재의 속을 채우는 시간이었다. 한 주 동안 밀도 있게 작업해서 첫 손님을 받는 게 목표였다.
출판전야를 준비하며 읽은 책 60권을 집에서 서재로 옮겼다. 그간 읽은 책을 한 데 모으니 뿌듯하면서도 그것들을 모두 4층까지 올릴 생각에 막막해지기도 했다.
집에 미리 받아 놓은 CD나 전기포트와 같은 집기도 꽤 있었다. 이사하면서 허리가 나가지 않도록 허리 보호대를 차고 최대한 나눠서 날랐다.
한바탕 이사를 한 후엔 짐을 정리했다. 책을 분류하여 책장에 꽂는 일에 특히 신경을 썼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책장이기에 서재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야 했다.
고독과 글쓰기 관련 책이 가장 잘 보이게 책장을 꾸몄다. 출판전야를 시작하게 해 준 책이 책장에 꽂혀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관현악단처럼 책장에 자리한 책들이 출판전야라는 교향곡을 연주했다.
가구는 서재로 바로 배송시켰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기사 분께 죄송했다. 책상이나 의자처럼 무거운 건 데이데이 팀에서 옮기는 걸 도와주셨다.
퍼즐 조각 하나하나가 제 자리를 찾아갈수록 서재가 구색을 갖춰 나갔다. 그러다 내가 생각한 그림이 이거였어하고 확 와닿은 순간이 있었다.
봄 디자이너 님이 만든 책상 천마행공(天馬行空), 하선 작가의 그림 전야(前夜), 소미 작가 님의 한지 블라인드 명창정궤(明窓淨几). 이 세 작품이 서재에 모였을 때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각기 다른 사람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이지만 어찌나 잘 어우러지던지. 세 분이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신기했다.
세 작품이 읊는 이야기 또한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서재의 가치를 잘 드러냈다.
천마행공 : 천마가 하늘을 날듯 구속감 없고 자유분방하게
전야 : 마침표를 찍기까지의 고되면서도 설레는 밤
명창정궤 : 밝은 창과 깨끗한 책상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세 작품의 질박함이었다. 치장하지 않은, 수수한 아름다움 덕에 서재가 전시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서재의 자의식이 강하지 않길 바랐기에 만족스러웠다.
퍼즐이 완성되어 출판전야가 하나의 그림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공간 촬영 일자를 잡았다.
데이데이 팀에서 내게 공간 촬영 모델을 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몽상가가 서재를 이용하는 컨셉으로 촬영할 계획이었다. 흔쾌히 알겠다고 했는데 잠시 뒤에 생각이 바뀌었다.
출판전야를 열면 꼭 찾아와 주셨으면 하는 작가 분이 있었다. 예전에 독립출판을 같이 했던 김로로(loro) 작가 님이었다. 로로 작가 님은 그 뒤로도 꾸준히 책을 만들어 오셨다.
일반적으로 책의 알맹이는 내용물인 글에 있다고 여겨진다. 로로 작가 님의 책은 다르다. 책 자체가 알맹이다.
작가 님의 손을 거쳐 탄생한 책을 보면 일체화된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글, 내지/표지 디자인, 종이 재질 등 책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라도 달라지면 아예 다른 작품이 될 것 같다.
작가 님의 작품을 애정하는 만큼 출판전야에서 글을 써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마음 때문인지 공간 촬영 모델 이야기가 나왔을 때 문득 로로 작가 님이 떠올랐다. 서재에 모시고 싶던 분이 모델이 되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무리한 부탁이지 않으려나 생각하면서도 로로 작가 님에게 연락을 드렸다. 오랜만의 연락이었음에도 로로 작가 님은 따뜻하게 답장을 해 주셨다.
갑작스러운 부탁에 응해 주신 것은 물론 촬영 컨셉이나 의상에 대해서도 먼저 물어봐 주셔서 감사했다. 촬영 당일에도 의상을 두 벌이나 챙겨 와 주셨다.
서재를 촬영하는 날, 출판전야라는 그림 안에 로로 님이 몽상가로 자리해 주셨다. 천마행공, 전야, 명창정궤 그리고 로로 작가 님의 앙상블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니.
촬영은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공간이 협소하고 조도가 낮아 작업이 쉽지 않았다. 로로 작가 님이 지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먼저 아이디어도 내주시며 두 팔 걷고 임해 주셨다.
그날 집에 돌아가며 감사해야 할 분들을 떠올렸다. 데이데이 팀, 하선 작가, 소미 작가 님, 로로 작가 님. 그 외에도 출판전야를 만드는 일에 도움을 준 분들이 많았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우후죽순 생겼는데 마침 주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이 계셨다. 큰 복이다.
출판전야는 고독의 서재이지만 그 탄생은 고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