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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Jun 15. 2024

첫 손님

두문즉시심산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한 출판전야. 마침내 고독의 서재라는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 출판전야는 이제 몽상가와 그들이 만들어 낼 이야기로 채워져야 했다.


첫 달은 지인 위주로 모셨다. 유료 손님을 받기엔 부담이 컸다. 오프라인 사업은 처음이라 접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첫 손님은 함께 소설 쓰기 모임을 하는 주원이었다. 주원이의 글은 섬세한 묘사 덕에 해상도가 높았다. 사용하는 단어도 다채롭고 딱 알맞은 자리에 들어갔다는 인상을 줬다.


로로 님과 더불어 주원이도 출판전야에 초대하고 싶은 작가 중 하나였다. 주원이에게 서재에 와서 글을 써달라고 했다.


이제 막 문을 열어 부족함이 많은 서재였지만 주원이는 더할 나위 없이 세심한 첫 손님이었다. 서재를 다녀간 후 장문의 후기를 남겨 주었다. 응원과 피드백 덕에 다음 손님을 자신 있게 받을 수 있게 됐다.

방명록의 첫 페이지도 채워 줬다. 고독의 서재에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있을까 싶은 글을 남겼다. 첫 타자로서 부담이 컸을 텐데 감사하다.

첫 손님의 흔적

주원이의 글을 수차례 읽었다. 손님이 남긴 방명록 보기. 출판전야를 준비하며 꿈꿔 온 장면 속에 내가 있었다. 이런 순간이 앞으로도 종종 오겠지라는 기대를 품었다.


이후에도 지인들을 손님으로 초대했다. 로로 작가 님은 물론 평소 가까워지고 싶던 분들에게도 서재를 구실로 연락을 드렸다. 한 번 와서 글을 써 주시면 좋겠다고.


그렇게 출판전야에 오신 손님을 맞이하며 서재 운영에 대한 감을 잡았다. 서재 도슨트 연습을 하고 뒷정리에 걸리는 시간, 개선이 필요한 점을 알아 갔다.


5월에 접어들고 서재 예약을 열었다. 준비한 콘텐츠를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광고도 돌렸다. 광고를 보고 많은 분들이 계정을 팔로우해 주셨다. 나도 설명하기 어려운 출판전야의 타겟을 어쩜 그리 잘 찾아 게시글을 노출해 주는지. 알고리즘이 참 신묘했다.


언제쯤 첫 비(非) 지인 손님이 들까. 광고를 돌리고 처음 며칠은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


기대감은 얼마 안 가 불안으로 바뀌었다. 이대로 영영 손님이 없으면 어떡하나. 기약 없는 기다림에 조바심이 생겼다. 월세가 나가는 상황에서 손님이 오지 않는 막막함을 견디는 사장님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서재를 어떻게 만들지만 고민하고 어떻게 팔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잘 만들면 알아서 팔리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상품 구성, 플레이스 리뷰 작업과 같은 일은 뒷전이었다.


사업하는 친구들을 만나 꾸지람을 듣고 조언을 받았다. 다 흡수하기엔 역량이 부족했지만 예약 상품 구성, 가격은 손봤다. 낮과 저녁 시간대로 나눠 예약을 받기로 했다.


명창정궤(明窓淨几) :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이용

전야(前夜) :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이용


친구들의 솔루션은 효과가 있었다. 얼마 뒤 첫 비 지인 예약이 들어왔다. 어떤 분일지 설레면서도 혹시 취소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비 지인 손님을 맞았고 서재 도슨트를 해 드렸다. 지인 손님에게 도슨트 한 게 연습이 되어 나름대로 잘 흘러갔다.


서재를 소개하는 10분 간 손님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뿐이랴. 손님의 자세, 목소리, 어조 등. 손님이 출판전야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손님의 반응을 느꼈다.


이 또한 서재를 준비하며 기대한 그림이었지. 온라인 서비스에선 접하기 어려운, 손님과 대면하는 경험. 비언어적 감상이 언어적 감상만큼 많은 걸 말해 준다는 걸 알게 됐다.


도슨트가 끝나고 서재를 나설 때 왠지 자식을 떠나보내는 듯했다. 서재는 손님과 함께 고독의 바다를 항해할 것이었다. 손님의 여정에서 서재가 제 몫을 해 주길 바랐다.


첫 비 지인 손님이 떠나고 정리를 하러 서재에 갔다. 어떤 흔적을 남기셨을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방명록 노트를 열었다.

호우시절(好雨時節)
꼭 필요한 때에 내리는 반가운 비처럼,
필요한 시기에 딱 맞는 공간을 만나게 되어 참 반갑고 감사했습니다.
또 만나요!


출판전야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도 필요한 장소가 될 수 있다.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을 남겨 주셔서 감사했다.


첫 손님이 마중물이 되었는지 그 뒤로 비 지인 예약이 조금씩 들어왔다. 주말에는 거의 뚝섬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아침 9시에 가서 서재를 청소하고 명창정궤 예약 손님을 받는다. 서재 근처 카페에서 5시까지 작업을 하다가 전야 예약 손님이 오기 전에 서재를 정리한다. 이게 주말 루틴으로 굳어졌다.


서재 운영하는 일은 우아할 것 같지만 사실상 청소의 연속이다. 먼지를 털고 책상과 선반을 닦고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한다. 화장실 청소에 특히 진심인데 변기 앞에서 누워서 잘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다.


반복되는 일과가 지루하지 않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 나온 음악을 크게 틀고 주인공에 빙의하여 화장실을 청소하면 잡생각이 사라진다.


예전에 군대에서 취사병을 할 때도 느꼈지만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뿌듯함을 느끼는 성격인 것 같다. 덕분에 체력적으로 지쳐도 정신적으로 힘든 적은 없다. 오히려 일상에서 얼룩진 마음을 닦아 내 개운해진다.


문제는 체력이다. 서재를 준비하며 누적된 피로가 체력적 한계를 넘어섰다. 아침 달리기와 헬스를 시작해서 체력을 늘리고 있다. 그야말로 생존 운동이다.


9월이 된 지금 연초를 돌아보면 아득하다. 그땐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 거라 생각도 못했다. 반년 전 나에게 지금의 난 지평선 너머의 존재다.


출판전야를 시작하고 평범한 어느 토요일의 아침, 서재를 청소하다 예전에 읽은 책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온종일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속임수가 과연 가능할 것일까?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패트릭 브링리는 책의 제목 그대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경이의 세계로 숨는다. 스스로의 질문에 행동으로 답한 것이다.


나도 그와 마찬가지다. 나도 출판전야라는 경이의 세계에 숨었다. 서재지기이자 몽상가의 지기(知己)로서 서재에서 태어날 이야기를 기다린다.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으니 곧 깊은 산중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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