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츠뉴 유정 님과의 대화
바야흐로 공간의 시대입니다. 성수동이라는 지역은 새로운 공간 경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공간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브랜드의 숫자를 체감하는 곳이기도 하죠. 그렇기에 공간기획의 전문가들은 이제 '지속가능성'과 '진정성'이 공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유행, 트렌드, 바이럴 같은 것들이 아니라 공간을 세심하게 채우는 진심과 정성이 더 소중해지는 요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발견한 공간을 꼭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창작자의 고독을 장려하는 1인 서재, 출판전야인데요. 뚝섬역 인근에 위치해 있지만 소란스러운 동네를 약간 비켜 있습니다. 1인 서재라는 다소 생소한 형태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요. 오로지 많은 방문자 수를 채우는 데 급급한 여느 공간과 달리, 1인이라는 제한을 두고도 태연한 이 공간은 무엇일까요? 출판전야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이준우 님을 만나 기획과정에 대해 들었습니다.
인터뷰의 전후상황 몇 가지
(1) 뚝섬역에서 서재까지의 거리는 도보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서재가 위치한 골목은 조용했고, 낮은 벽돌 건물만이 성수동을 어렴풋이 느끼게 했다.
(2) 출판전야의 공간 도슨트를 받았다.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있었다. 그 부분은 미처 인터뷰로 받아 적지 못했으나, 다행히 책상에 마련된 공간 가이드북에 같은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3) 인터뷰에 앞서 출판전야를 이용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늦은 밤까지 준비해 온 원고를 마감했다. 쾌적하고, 고요한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준우 님. 출판전야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출판전야는 ‘몽상가를 위한 1인 서재’입니다. 조선시대 사랑방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어요. 2년 전부터 준비해 오던 공간이 이번 5월에 드디어 문을 열었습니다.
이런 공간을 기획한 준우 님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요.
본업은 IT 서비스를 만드는 기획자예요. 출판전야는 일종의 사이드 프로젝트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더 이전에는 에세이나 소설을 독립출판하기도 했고, 그 모든 게 연결돼서 출판전야라는 공간에 이른 것 같습니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공간을 만드는 경우는 처음 봤어요. ‘공간’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있을까요?
본업에서 만드는 IT 서비스는 손에 잡히지 않고, 결과물을 보여주더라도 사람들의 반응을 만나서 체험하긴 어려워요. 그런데 물성이 있는 것들, 이를테면 독립출판은 제가 직접 책을 드리면 그분이 받아서 읽고 같이 이야기하는 실체적인 즐거움이 있잖아요. 공간이라면 그런 즐거움이 더 크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공간이란 어떤 사람의 개성을 드러내는 굉장히 좋은 매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가면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는 사람이구나’ 알 수 있잖아요.
이 공간은 준우 님의 개성과 취향이 모여 있는 공간이기도 하겠군요.
제 정체성 중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누리고 싶은 부분을 모아놓았어요. 사실, 저는 앞으로 모두가 회사를 떠나 스스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려면 자기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하고요. 이 공간도 저라는 사람을 한 브랜드로 보여주는 연습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놓고, 과연 사람들이 브랜드로서 받아들이고 소비해 줄지 테스트하는 일종의 전초기지 같은 느낌이에요.
1인 서재라는 컨셉은 어떻게 정하게 되었나요?
우리나라에 1인 가구가 많잖아요. 유현준 교수님의 저서 <어디서 살 것인가>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1인 가구를 위한 집들이 넓지 않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로 채우기에 급급하다 보니까 창의성이 자라나기 쉽지 않은 환경이라고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도 여자 작가의 소설이 혹평을 받은 것에 대해 ‘공동의 거실에서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짚어요. 여자들이 글을 쓰는 ‘자기만의 방’이 없었다고요. 사실 글 쓰다가 뒤에서 누가 와서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잘 안 되잖아요. 창작자, 글 쓰는 사람에게는 온전히 몰입하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데서 이 공간이 출발했어요.
2년 전부터 공간을 준비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꽤 긴 시간인데요. 구체적인 준비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처음에는 출판전야를 숙소로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숙소는 만들려면 돈이 되게 많이 필요하잖아요. (웃음) IT 업계에는 MVP라는 개념이 있어요. 최소 요건 제품이라고 하는데요.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1부터 100까지 다 만든 다음에 시장에 내놓는 게 아니라, 제품에서 핵심적인 부분만 먼저 개발해 보고 시장에 내놔서 판단하는 거죠. 그럼 개발 기간도 줄일 수 있고, 실패에 대한 위험도 줄일 수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출판전야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서재’니까 그걸로 먼저 시작해 보게 된 거예요. 덕분에 필요한 비용도 확 줄었고요. 올해 2월에 부동산 계약을 하면서 급물살을 타고 여기까지 왔어요.
공간사업도 MVP로 해석한 점이 흥미로운데요. IT 서비스 기획과 공간 기획이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기획’의 측면에서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매체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사람들이 쓰는 서비스라는 점은 동일한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즐겁게, 재미있게 쓸 수 있을까 고민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IT 업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사용자 중심 사고를 중요시하고, 거기서 배운 UX에 관련된 지식들이 ‘공간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어떤 걸 먼저 접할지’, ‘공간을 어떻게 브랜딩하는 게 좋을지’ 판단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앱에서 사용자가 이동하는 동선과 공간을 이동하는 동선이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또, 프로덕트가 나오기 전에 미리 고객을 모집할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만들기도 하는데요. 이 공간도 실제로 나오기 전에 웹사이트(링크)를 만들어서 공간을 준비하는 과정을 쌓아나갈 수 있었어요. 그건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출판전야라는 브랜드도 형성해 나갈 수 있었죠.
공간을 기획할 때는 주로 어떤 고민을 했는지도 궁금해요.
공간기획을 하는 사람이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브랜딩부터 공간의 모든 요소와 철학을 고민하는 타입과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공간을 만드는 타입. 후자에서 더 예쁘고 트렌디한 공간이 나올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 걸로 승산을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속 가능하려면 주인의 철학이 드러나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공간의 컨셉인 ‘고독’이나 ‘몰입’에 대해 남들보다 더 공부하고, 깊이 있게 파고들었고요.
이 공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는 무엇이었나요?
처음부터 ‘책상’이 가장 중요했어요. 의자는 허먼밀러의 기성 제품인데 이미 200만 원이 넘어요. 오래 앉아 있으려면 좋은 의자를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그런데 책상은 그보다 더 중요한 거니까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고 제가 인테리어팀을 못살게 굴었죠. (웃음) 책상이 마치 바에 있는 테이블처럼 상판이 두껍고 무거운데요. 창작자의 근심을 다 받칠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책상의 짜임도 전통 가구에서 착안한 모양이고요.
하나하나 글 쓰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느껴져요. 기획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공사하고 운영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그동안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인테리어는 잘 모르는 분야다 보니까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예를 들어 IT 업계에서는 배경을 빨간색으로 했는데 별로면 Ctrl+Z 누르면 되거든요. 저희 용어로는 ‘롤백’이라고 하는데, 기존 상태로 되돌리기가 쉬워요. 그런데 인테리어는 제가 마감재를 골랐는데 마음에 안 들어도 되돌리기가 어려운 거죠. 그럼, 돈도 시간도 많이 들고요.
앱은 새로 만들 때 제로 베이스에서 만드는데, 공간은 애초에 그 건물이 갖고 있는 특성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 또 새로웠어요. 제가 원하는 레퍼런스가 공간에 맞지 않으면 타협해서 진행해야 하고요. 실제로 출판전야의 브랜딩은 고독한 밤의 이미지를 주고 싶었는데, 실제 공간은 창이 너무 크고 빛이 많이 드는 거예요.
충분히 이해가 가네요. 어떻게 해결했나요?
한지 블라인드를 두고 빛이 은은하게 들어오게 해서 ‘명창정궤’라고 이름을 붙여줬어요. ‘밝은 창에 깨끗한 책상’이라는 뜻이에요. 조선시대 선비들은 빛이 너무 세도 좋은 서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대요. 적당히 은은하게 들어오는 빛이 가장 좋은 거죠. 낮에는 선비의 이상적인 공부방이, 밤에는 어둡고 고독한 전야의 방이 됩니다.
곳곳에 지어놓은 이름이나 설명이 눈에 띄어요. 책상에도 ‘천마행공’이라 쓰여 있고, 음료와 다과는 ‘마중물’이라고 썼고요. 책에서 발췌한 인용구도 많습니다.
공간을 준비하며 읽은 책과 남겨둔 메모의 힘이 커요. 저에게 도움이 되었던 문장들을 여기에 잘 녹여내고 싶었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출판전야라는 공간이 어떻게 쓰였으면 좋겠나요?
나중에는 자기만의 작업 환경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장소가 되면 좋겠어요. 사연을 받아서 일주일에 하루 정도 모셔 온다든지요. 만약에 저희가 제공하는 장소 덕분에 그런 분들이 와서 세상에 없던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정말 특별한 일일 거라 생각하거든요.
본업이 아닌 사이드 프로젝트로 공간을 운영하기 때문에 가지는 장점이기도 한데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니까 제가 추구하는 무형의 가치를 위해 출판전야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 수익을 목표로 한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거예요. 모든 장소가 수익 창출을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예를 들어 앱 중에서도 어떤 앱은 그냥 예술적인 니즈를 위해서 만들어지기도 해요. 필요하지만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것들이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나올 수 있고, 그게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준우 님의 사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이 공간 곳곳에도 녹아 있는 게 느껴져요.
이 장소가 독립출판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독립출판도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만들잖아요. 대형 출판사에서는 쉽게 귀 기울이지 않는 이야기, ‘돈도 안 되는 거 뭐하러 해’ 이런 관점에서는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는 목소리, 그래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 출판전야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지면 좋겠네요.
인터뷰 전문 출처 : 왓츠뉴 유정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