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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붓인 이유를 물으신다면

어쩌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by 아리




우붓에 사는 동안 이 질문을 꽤 많이 받았다.


"어쩌다 여기 살게 된 거예요?"


초면에 불쑥 이유를 묻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더 열심히 답을 찾았다. 마음속 서랍에서 예전 기억들을 꺼내 먼지를 후 불면 내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뽀얗게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이 싫었던 건 아닌데, 삼십 년 넘게 살아서 좀 지겨웠다고 할까요? 한 나라에서 삼십 년이면 충분하다고, 이제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혼한 상태였죠. 혼자보다 둘은 더 움직이기 힘들었고 아이까지 셋이었으니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모험이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결혼했어도 모험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떠났어요. 떠나길 잘했던 것 같아요. 끝을 모른다는 것, 그게 절 설레게 해요.

딱 1년 직장생활을 했던 적이 있어요. 출근하고 퇴근하고 밤마다 운동하러 가고 가끔 친구들과 술 한잔하는 아주 바람직하고 규칙적인 생활이었죠. 매일 똑같은 그 하루가 싫었어요. 일이 힘든 것도, 누가 날 괴롭히는 것도 아니었고 생각하기에 따라 그저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젊었나 봐요. 너무 일찍 쳇바퀴에 들어서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돈 벌고 쓰는 재미, 모으는 재미, 퇴근 후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 낭비하는 재미, 그런 재미가 있었지만, 계절이 한 바퀴 도는 동안 매일 밤 생각했어요. 벗어나고 싶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이 생활 정말 지겹다. 내일이 궁금한 생활이 필요했어요. 내일은, 일주일 후에는 어디서 무엇을 할지 모르는 세상에서 모험하며 살고 싶었어요. 결혼했다고 해도, 아이가 있다고 해도 말이에요. 그래서 떠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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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거다.


"그럼 왜 하필 우붓이에요?"


왜 우붓이냐고요?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아이가 일곱 살 때 발리로 가족 여행을 왔어요. 힘들게 겨우 낸 시간이었죠. 그때 우붓에 며칠 묵으면서 시내 운동장 옆에 있는 허름한 도서관에 갔어요. 먼지가 뿌옇게 쌓인 책들이 두서없이 꽂혀 있었죠. 세계 곳곳을 떠돌다가, 주인을 잃고 헤매다가 손에 손을 거쳐 그곳에 도착했을 책들이 가득했어요. 2층으로 올라가면 모양도 색도 다양한 나무 책상과 의자들이 뻥 뚫린 창 너머 열대의 풍경과 퍽 어울렸죠. 먼지가 서걱서걱 밟혔고 더 연로한 먼지는 타일 바닥과 하나가 되어 발바닥을 새카맣게 만들었어요. 여행 중이었음에도 회원가입을 해 아이가 읽을 책을 빌렸고 다음 날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와중에 부랴부랴 도서관에 들러 책을 반납하면서 생각했어요. 여기서 살아보고 싶다고. 그뿐이에요. 이상하죠? 책이 그렇잖아요. 책들은 가끔 그렇게 알 수 없는 마법을 부려요. 아무튼, 그래서 왔어요. 그래서 우붓이었어요. 아, 그리고 또 있어요. 우붓에서 살아볼까 고민하면서 필요한 정보를 검색했는데 어쩌다 이미 우붓에 사는 이들의 블로그를 보게 되었어요. 책장 사진이 있더라고요. 책에 관심이 많으니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 유심히 봤죠. 그런데 몹시 편협한 제 책 취향과 아주 비슷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구나. 그럼 나도 살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한 거죠. 너무 단순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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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떠났고, 그래서 우붓이었다. 그래도 답이 부족하다면 더 오랜 이유도 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로 떠났다. 영어를 배우러 간다고 했지만 속마음은 탈출이었다. 더 큰 세상을 맛보고 싶었다. 비행기 표와 3개월 학비만 들고 시드니 공항에 내렸다. 영어를 공부했고 돈을 벌었고 여행을 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사람을 대하는 새로운 방법을 익혔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직업의 귀천과 나이와 출신에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대학이라는 타이틀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렸던 내게, 사다리 끝까지 최대한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배웠던 내게, 사다리 따위 올라가지 않아도 당당했던 사람들과 그들이 맺는 평등한 관계는 한여름 얼음물처럼 청량했다.


아무도 이전의 나를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나는 누구도 될 수 있었고 동시에 누구도 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무대에 서는 배우인 양 다른 성격을, 다른 삶을 실험해 보았다. 이런 사람도 되어보았다가 저런 사람도 되어보았다. 다양한 모습 중에서 내게 가장 잘 맞는 모습을 찾아 나갔다. 자유로웠다. 새벽같이 일어나 호텔로 출근해 열심히 접시를 나르고, 푸른 잔디와 싱그러운 나무가 가득한 공원을 거닐다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도서관에서 영어책을 빌려 모르는 단어를 찾으며 읽고, 세계 각국의 다양한 친구들과 뿌연 연기 속에서 몸을 흔드는 시간들이 꼬박꼬박, 만족스럽게 지나갔다. 알람으로 맞춰놓은 영어 뉴스를 이해하며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되기까지 나는 차곡차곡 여물었다. 매일 다를 것 없었지만 또 매일 조금씩 다른 일상을 뚜벅뚜벅 걸었다. 모험과 일상이 사이좋게 공존했다. 미소 짓는 날들이 많아졌다. 완전히 홀로 선, 타인의 섣부른 시선이 닿지 않는 나로 사는 것이야말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일상의 대전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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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돌아왔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 순간 나는 제도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어쩌다 보니 아빠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서고 있었고, 산부인과에서 무통 주사를 맞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는 아이의 기저귀가, 손에 익지 않은 살림살이가, 그가 벗어놓은 양말 짝이 들려있었다. 문득 두려워졌다. 아직 해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유럽도 못 가봤는데, 덜커덩, 삶의 커다란 철문이 닫혀버린 듯 망연자실했다.


한국에서의 삶은 여전했다. 학생이라면 무릇 이래야 한다는 당위는 엄마라면 이래야 한다는 당위로 탈바꿈했고, 딸과 여자들은 때가 되면 엄마라는 옷으로 착착 갈아입고 무수한 눈빛에 맞춰 움직였다. 내가 네 삶에 대해 당연히 한마디 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친구들의, 제도의, 사회 전체의 그 근거 없는 당당함이, 떠돌다 돌아왔으니 어서 빨리 따라잡으라는 그 눈빛들이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그 혼탁한 시선이 끼어든 일상은 다시 벗어나고 싶은 일상이 되었다. 아이를 안고 생각했다. 늦었지만,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결혼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다른 삶 역시 놓치고 싶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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