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 상태에서 오른손을 살살 당겨요! 너무 세게 당기면 오토바이가 갑자기 튕겨 나가고 너무 천천히 당기면 멈춰버려요. 적당한 속도를 찾는 게 중요해요."
처음 오토바이에 앉았을 때의 긴장과 설렘이 떠오른다. 자전거 탄 가락은 있으니 균형은 잡겠는데 무게는 자전거에 비할 바가 안 되니 한 번 균형을 잃어 휘청거리기라도 하면 목덜미부터 척추를 따라 찌릿한 느낌이 들도록 용을 써 버텨야 했다. 처음 운전을 배울 때, 액셀을 밟는 것도 아니고 안 밟는 것도 아닌 상태로 덜덜 떨던 것처럼 오른손 핸들을 살짝만 당기기가 쉽지 않았다. 액셀은 신발이라도 신고 밟지만 오토바이 핸들은 손에 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자칫 미끄러져 확 당겨 버릴까 더 겁이 났다. 살짝 당긴다고 당겨도 부아아앙 급발진을 하고 살짝 당긴 채로 유지한다고 해도 이놈의 오토바이는 약 올리듯 살짝궁 멈춰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금방이었다. 얼마 안 가 공터를 한 바퀴 돌았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으며 차도 다니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최적의 연습 장소였다. 까까머리 동네 아이들과 인적 없는 가게 앞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아낙들만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다음날은 차는 거의 없지만 오토바이는 달리는 엄연한 길을 조금 달렸고 또 그다음 날은 집 근처에서 가장 한적한 길, 밑동을 도는데 족히 10분은 걸릴 거대한 나무가 휘청휘청 가지를 드리운 공동묘지 옆길을 달렸다. 차도 오토바이도 빈번히 출몰하는 길이었기에 갈 때는 벌벌 떨었지만, 되돌아올 때는 시나브로 자신감이 붙어 짜릿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토바이에 대한 내 무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하염없이 달리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르는 곳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길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푸른 논이 휙휙 지나갔다. 공사 자재를 잔뜩 얹은 거대한 트럭이 쌩하고 앞질러 가는 순간에는 심장이 확 쪼그라들었다 펴졌다. 성질 급한 청춘 남녀의 오토바이도 나 추월해요, 하며 빵 하고 지나갔고 자동차는 꽁무니에 달라붙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가 아슬아슬 빗겨 앞서갔다. 속도가 붙기 시작하니 나도 한두 명쯤 앞지를 수 있었다. 오토바이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느라 정신없는 어린 소녀를 앞질렀고, 네 가족을 전부 태우고 뒤뚱거리는 오토바이도 따라잡았다. 누런 논을 지나고 허름한 식당 앞에 아이를 안고 앉은 젊은 엄마와 낫 하나 쥐고 터덜터덜 걷는 할아버지와 웃통을 벗고 벽돌 쌓느라 땀을 뚝뚝 흘리는 아저씨도 지났다. 제 키보다 더 큰 자전거 바퀴를 힘겹게 굴리는 꼬마도 앞질렀다.
그 속도감이 좋았다. 자동차 액셀을 밟을 때보다 더 팔딱이는 맛이 있었다. 자동차의 속도감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갇혀 있지 않으므로 온몸으로, 오감으로 느끼는 살아 있는 맛이 있었다. 그 상쾌한 속도, 윙윙대며 헬멧을 파고드는 온갖 소리, 거친 듯 부드럽게 굴러가는 바퀴. 자갈길을 달리면 엉덩이가 들썩들썩한 대로, 잘 닦인 길을 달리면 매끈하게 나가는 대로 다 좋았다.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면 열대의 작렬하는 태양에 팔뚝과 허벅지가 서서히 뜨거워졌다. 내 몸의 온도가, 피부가 시시각각 달아오르는 그 느낌조차 만족스러웠다. 비가 오면 슈퍼맨처럼 펄럭여 입으나 마나 한 비옷을 입고 달리는 대로, 빗방울이 줄줄 흐르는 선글라스 너머를 눈 부릅뜨고 째려보며 달리는 대로 다 좋았다. 쌀쌀한 아침이면 카디건을 걸쳐 입고 평소보다 더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게 좋았고, 밤에는 밤대로 낮과는 다른 우붓의 밤을, 흥겨운 여행자들을, 소박한 불빛을 구경하는 게 좋았다. 우붓 생활에서 가장 좋은 점은 뭐니 뭐니 해도 라이딩이었다. 아이의 첫 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에 들어가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도 바로 한 달 동안 내 사랑 오토바이를 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동네 치킨집이나 짜장면집 앞에 줄줄이 서 있는 오토바이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침을 흘렸다. 배달의 기수들이 그때만큼 부러웠던 적은 없었다.
오토바이를 타다 보니 가끔 타는 차가 너무 답답해졌다. 꼭 동물원에 갇힌 한 마리 가련한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답답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인가. 이렇게 오토바이가 자연스럽고 또 타기 편한 곳에서, 이렇게 시원하고 자유롭고 교통체증과도 상관없는 오토바이를 놔두고.
오토바이는 결국 자유였다. 그 자유의 바람을 느끼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다시, 결혼이었다. 훨훨 달리는 오토바이에 앉아 나는 내 삶을 복기했다. 어쩌다 이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지, 어쩌다 남편을 두고 아이만 데리고 우붓으로 와 이 짜릿한 자유의 바람을 맞고 있는지. 멀리 떠나와 있는 내 모습이 만족스러운 만큼, 다시 돌아가 있는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결혼은 생각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결혼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때가 되었다고 느꼈고, 이상하게 부모님도 경제적 대책 없는 두 남녀의 결혼에 반대하지 않으셨다. 아빠의 퇴직 전 결혼이라는 목적을 향해 모든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그 시절 우리는 둘 다 없이 사는 데 익숙했다. 다 같이 모여 밥을 해 먹고, 적은 공연료로 다 함께 아껴 쓰며 생활했다. 하지만 결혼과 육아는 달랐다. 결혼과 동시에 아이가 생겼고 우리는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단칸방이라도 얻으려면 부모님 손이 필요했고, 냉장고에 뭐라도 채우려면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일을 시작했다. 나는 아이를 먹이고 재웠다. 남편은 진보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결혼과 동시에 뼛속 깊은 자기 안의 가부장을 드러냈다. 의도를 갖고 한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니체가 말했다.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관통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관통한 시대를 성실하게 보여주며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처음 오토바이에 탔을 때처럼, 처음 무대에 섰을 때처럼, 처음 결혼했을 때도 설렘은 있었다. 하지만 모든 설렘은 곧 익숙해진다. 무대도 그랬고 결혼도 그랬다. 육아는 설렘을 압도하는 긴장이었다. 결국 긴장만 남았고 나는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더 버티지 못하고 그렇게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달리며 생각했다. 다시 그 결혼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인생의 시계를 더 뒤로 돌렸다. 그를 만나기 전, 그때 호주에 자리를 잡았더라면, 그때 다들 그랬던 것처럼 영주권을 따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 온갖 만약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 싱그러운 바람결에도 눈에는 간혹 눈물이 차올라 바람에 실려 툭 날아갔다. 내 삶이 엇갈린 것인가, 내 마음이 틀어진 것인가. 무엇이 엇갈리고 틀어졌든 이 힘찬 오토바이 바퀴가 빳빳이 펴줄 수는 없을까. 이대로 계속 달리다 보면 내 삶도 자유로워질까.
하지만 목적지는 늘 아이의 학교와 집이었다. 아직은 그곳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