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 풍덩, 삶에 풍덩
우붓에서 두 번째로 구한 집에는 나무 두께가 20㎝도 넘는 원목 책상이 있었다. 여전히 단칸방이었고 아이와 한 침대에서 뒹구는 소박한 삶이었지만, 두툼한 나무 책상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방 한구석에 나만의 책상이 있어서 좋았다. 아니, 반드시 필요했다. 뻥 뚫린 거실로 나가면 그보다 두 배 정도 큰 원목 식탁이 있었다. 낮에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나면 그곳이 나만의 작업실이 되었다. 나는 식탁보다 책상이 더 중요한 여자였다. 냉장고보다 책장을 더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엄마들이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책장보다 냉장고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된다. 책상보다 식탁과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렇게 빠져나오니 좋았다. 커다란 원목 테이블에 음식을 차리든 책을 펴든 자유로웠다.
중학교에 올라가던 때, 우리 집에 책상만 한 방이 생겼다. 조그만 한옥에 아빠는 시간이 날 때마다 흙을 나르고 벽돌을 쌓았다. 넓던 화단은 벽에 바짝 붙도록 작아졌고 마당은 흙으로 다져 마루와 연결된 거실이 되었다. 비었던 공간에 싱크대가 들어섰고 변기와 욕조도 아빠의 손으로 하나씩 자리를 잡아갔다. 책상 하나가 딱 들어가는 자투리 공간이 바로 책상 방이 되었다. 맏딸이었던 내가 그 방을 차지하면서 세 자매가 함께 쓰던 방에서 벗어났다. 집에서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은 그 책상 방뿐이었다. 답답한 줄도 모르고 공부를 하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공상을 했다.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책상이 내 삶에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책상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결혼하면서도 당연히, 함께 쓰는 책상이 아니라 나만의 책상을 원했다. 좁은 집에 굳이 두 개의 책상을 들여 신혼집을 사무실화했고 시댁에 들어가 살 때도 침대와 옷장으로 꽉 찬 방구석에 기어이 책상을 들여놓았다. 책상이 없으면 삶이 공허했다. 투명인간처럼 있을 곳이 없다 느꼈다. 책상에 앉아야, 내가 사는 곳이 여기구나, 마음이 놓였다. 시댁에서 나와 새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큰 맘먹고 책상을 샀다. 180 센티미터나 되는 빨간 상판의 커다란 책상을 들여 나만의 작업실을 만들었다. 그 공간이 너무 좋아 반들반들한 표면을 쓰다듬으며 할 일이 없어도 앉아 있었다. 그러다 그 책상에서 내 이름이 박힌 첫 책을 번역했다. 책상은 나를 돌보는 공간이었고 꿈을 찾는 공간이었으며 결국 나를 사용하는 공간도 되었다. 이십 대의 방황, 때늦은 자아 성찰과 진로 탐색의 시기를 겪으며 번역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지만 뒤늦게 아이를 낳고 나서야, 꾸역꾸역 포기하지 못했던 그 책상에서 비로소 번역가가 되었다.
소설가 이순원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결혼하면서 장롱, 냉장고, 세탁기 등 많은 것을 준비해요. 그런데 정작 책상은 생각을 안 하죠. 식탁이나 화장대에 앉아 책을 볼 수도 있겠지만 책상이라는 것은 자아의 성역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책상은 중요하죠.’ 부엌에서 책을 읽고 공부할 수도 있지만, 엄마에게도, 결혼한 여자에게도 자기만의 공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결혼한 여자의 독립된 작업실, 혹은 서재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 사회에는 없었다. 아빠의 서재는 누구에게나 익숙했지만, 엄마의 서재라는 말에는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시에 책상은 노력의 공간이었다. 커피 한 잔 타서 앉아 여유를 부릴 수도 있지만, 책상 방 시절부터 책상은 미래를 위한 노력의 공간이었다. 대학에 가기 위한 공간, 대학에 가서는 학점을 위한, 취업을 위한 공간이었고, 결혼 후에도 역시 경제적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우붓에 와서 보니 좀 이상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노력하는 모습만 익숙했던 내게 우붓의 친구들은 신기했다. 미래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현재를 포기하지 않았다. 최대한 순간을 즐기며 놀았다. 야자나무 위에 둥근달이 대롱대롱 걸려 있던 밤이었다.
“안 돼! 이게 마지막 옷이란 말이야! 이거 젖으면 집에 못 가!” 그래도 멈출 손길들이 아니었다.
“잠깐! 주머니에 전화기도 있어!” 그 순간 손 하나가 주머니로 쑥 들어오더니 전화기를 낚아챘다.
그래, 던져라. 던져! 이제 수영장 잠수쯤은 눈감고도 할 수 있다, 뭐!
풍덩! 꼬르륵 잠겼다가 바닥을 딛고 촤 올라왔다. 빠져놓고도 신이 났다. 왁자지껄 웃음소리에 물을 뚝뚝 흘리며 기어 나왔다. 쫓고 쫓기는 자들의 광란. 쫓는 자들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다음 대상을 물색한다. 쫓기는 자는 다음 차례라는 걸 깨닫는 순간 최대한 아무거나 붙잡는다.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게 유리 문 손잡이를 움켜쥐기도 하고 거대한 원목 식탁 다리를 애처롭게 껴안는다. 방으로 도망가 문을 잠가버리는 완벽주의자들도 있고 던져지는 게 겁이 나 아예 자진 입수하는 이들도 있다. 온 집안을 흥건하게 만드는 추격전 끝에 누군가 풍덩 던져지면 시선을 고정한 채 긴장했던 눈빛도 일순간에 풀어지며 와하하 웃음소리가 났다. 분명히 수영복을 챙겨 오라고 했는데 대부분 입은 옷 그대로다. 나는 하필 두꺼운 청바지를 입은 날이었다. 마르려면 한참 걸릴 텐데, 생각하며 나도 웃음을 보탰다. 놀이가 한풀 꺾이며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물속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물을 뚝뚝 흘리며 여기저기서 다시 술잔을 들고 담뱃불을 붙였다. 부지런한 친구들은 벌써 젖은 몸을 닦고 보송보송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이대로 파티가 끝날 수는 없는 법. 기왕 젖은 몸들이 다시 자발적으로 입수하면서 웃음소리가 또 커졌다. 진작 옷을 갈아입고 나온 마리아는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젖은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어쩌다 보니 그녀만 빼고 다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 혼자 남은 그녀를 어찌 그대로 두겠는가. 남자들이 다시 물을 뚝뚝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이 옷도 빌려 입었다고!” 그러든 말든 막무가내로 달려들자 그녀가 협상을 시도했다.
“알았어, 알았어! 잠깐만! 들어갈게. 들어간다고. 어차피 여기 남자는 한 명도 없잖아. 다 게이지, 그렇지?”
그리고 빛의 속도로 티셔츠를 벗었다. 속옷도 안 입은 상체를 드러낸 채 전속력으로 달려 소리도 요란하게 첨벙 뛰어들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보름달도 웃다가 깜짝 놀라 덜컥 떨어질 만큼.
그런데 그렇게 웃다가도 나는 자꾸 어색했다. 지금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이렇게 넋 놓고 놀아도 되나. 놀지 못하는 사회에서 온 사람답게 말이다. 한국은 놀지 못하는 사회다. 늘 목표가 있고 놀지 말아야 할 이유도 차고 넘친다. 놀고 놀아야 할 어린 시절부터 학원으로 내몰리고 청소년들도 갈 곳이 없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놀 줄 몰라 술잔만 기울인다. 자투리 시간 활용, 30분 자기 계발 등 쉴 틈도 없이 놀지 말고 앞으로 정진하라고 떠민다. 다양한 취미가 늘어가고 있지만, 그것도 어쩐지 목표지향적이다. 뜨개를 하면 팔아 돈을 벌어야 할 것 같고 달리기를 하면 철인 3종 경기라도 나가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놀이를 잊고 나이라는 계단만 착실히 올라간다. 누구를 만나든 서로 나이를 공개해 서열을 정하고, 놀아도 각자 나이에 맞는 칸에서 논다. 이삼십 대 ** 동호회, 4050 ** 모임처럼 같은 놀이도 끼리끼리 한다. 삼십 대가 요가를 하러 가는 곳과 오십 대가 요가를 하러 가는 곳은 다르다. 우리 사회에 자동 꼰대 발생률이 높은 것도 그 시퍼런 나이 구분 때문이 아닐까.
놀지 못하는 사회에서 결혼까지 하게 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결혼과 동시에 즐거움은 포기하는 자세가 기본 장착된다. 안락한 집과 차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 열심히 일해야 하고, 때마다 바꿔야 하는 집과 차를 위해, 천문학적으로 들어간다는 아이의 교육비를 위해 열심히 통장을 불려야 한다. 하지만 삶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소유가 아니라 태도라는 것을 우붓에서 배웠다.
갓 세상 탐험을 떠난 이십 대부터 손녀딸이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나이도 인종도 국적도 다양한 이들이 모여 그렇게 놀았다. 신선했다. 내가 생각지 못했던 나이와 놀이의 조합. 우리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고 놀이를 잊는다. You only live once, 한 번뿐인 삶을 너도나도 외치지만 정작 즐기는 법은 모른다. 놀이에 나이는 상관없었다. 우붓에서는 아무도 서로의 나이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간혹 한국 사람들이 나이를 물어오면 내 나이가 몇인가, 한참 생각하고 계산했다. 그렇게 나이를 잊고 다양한 친구들과 놀았다. 꼰대가 아닌 친구가 삶의 지혜를 나눠주었고 새파랗게 젊은 친구가 삶의 에너지를 나눠주었다. 나이 따위 가뿐히 잊고 신나게 노는 방법을, 내 인생의 한여름에 물에 빠져가며 배웠다. 그토록 포기하지 못했던 책상이 조금은 덜 사랑스러워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너무 오래 책상에 앉아 있었다고. 이제 좀 놀고 싶다고. 아낌없이 놀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이처럼, 나도, 그리고 한국에 있는 남편도 함께, 더 늦기 전에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