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붓에 다녀오려고요
옛날 옛적,
사람이 아닌 몰골로 침 묻은 수유 티를 입고 집 안에 갇혀 살던 시절, 친구가 책을 한 권 사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아기를 먹이고 재우고 달래며, 그때 친구와 나눈 이야기는 아마 얼마쯤 우울했을 것이다. 사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있는 기억도 몽땅 사라지는 마당에 새롭게 뭔가를 기억할 체력이라곤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친구가 돌아간 후,
여전히 아기를 먹이고 재우고 달래며 틈틈이, 잠든 아이 옆에서 꾸벅꾸벅 졸며 그 책을 읽었다. 도저히 읽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었다. 무려! <결혼한 여자 혼자 떠나는 여행, 결혼 안식년> 아직 결혼 1주년도 기념하지 않은 내게, 친구는 참 용감도 했다. 그런 선물을 하다니.
결혼에서의 안식 휴가. 사실상 수세기 동안 다른 형태로 가장되어 이루어져 왔다. 중세시대 부유층 유부녀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면 수도원으로 가 은거하였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과도한 불안 증세를 나타내는 심인성 질병, 히스테리의 치료를 위해 배 타고 떠나는 여행, 도시에서 시골로의 긴 여행 등 신경계에 새로운 활력을 줄 만한 것들을 권했다.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감과 짜증을 보이는 신경쇠약증의 치료법 중에는 가족을 비롯한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라는 처방도 있었다. 이 시대에는 수중치료 기관이나 요양소 같은 여러 은신처들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결혼안식년>
솔깃했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에게 결혼에서 벗어날 안식이 필요했다는 거지? 실제로 그렇게 가족을 ‘잠시’ 떠나는 여성들도 많고? 책을 다 덮고 강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언젠가 나도 그렇게 떠나겠구나.’ 그런데 과연 무슨 이유로? 정말 떠날 수 있을까? 강한 예감과 함께 물음표들도 꾸물꾸물 올라왔다.
여성이 남편을 떠나 평생 꿈꿔온 모험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해서 그녀의 결혼 생활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가 헤어지는 것은 역경 때문이 아니라 성장했기 때문이다.”라고...... 축복받은 결혼 생활을 하는 여성일지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갈망할 수 있다. 그것은 배우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한 휴식시간을 원하는 것이며, 벗어나고픈 욕망이 아니라 자유로움을 느끼고픈 욕구이다. <결혼안식년>
그래, 벗어나고픈 욕망보다 자유. 결혼이 행복해도 떠날 수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떠나고 싶다.'는 욕망 자체로 떠날 수 있다. 책에는 공부를 위해, 일을 위해, 그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그렇게 다양한 이유로 몇 개월부터 몇 년까지 집을 떠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더 멋지게 돌아왔다. 그녀의 변화는 남아 있던 가족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결혼은 당연히 '선택'이 되었고,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여성들은 당당하게 자기만의 삶을 꾸린다. 동시에 여전히 결혼을 선택하는 여성들이 있다. 백 명이면 백 가지 이유로. 그런데 일단 결혼을 선택하면 그 안에서 나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남성에게도 어느 정도는, 하지만 특히 여성들에게.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나'를 잊고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된다. 결국, 결혼하고서도 자신의 꿈과 욕망에 솔직한 여성들이 귀해지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런 여성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어느새 시간은 흘렀고 강력했던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아이는 예뻤고 남편은 힘이 되었지만 결혼은 내게 너무 안정적인 생활이었다. 육아와 살림이 차분하고 우아하게 돌아간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루하루 자잘한 모험들이 아이와 함께 펼쳐졌지만 나는 어른의 모험이 필요했다. 세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아이의 모험에 환호해주는 것도 뻐근하게 기쁜 일이었지만, 내 모험도 여전히 고팠다. 나는 떠나고 싶었다. 떠나고 싶다는 이유 자체만으로.
결국, 유치원을 졸업한 아이 손을 잡고 우붓으로 떠났다. 결혼이 1순위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1순위에 놓고 살아보는 시간을 위해서. 남편은 한국에 남았다. 그는 황망한 표정이었지만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를 (반쯤은 억지로) 이해해 주었다. 1년은 모험을 하기에 너무 짧고 3년은 가족이 헤어지기에 너무 긴 시간 같아 2년.
2년 후에 돌아올게.
그렇게 남편을 한국에 두고 단출한 짐을 꾸려 우붓에 자리를 잡았다.
우붓은 인도네시아 발리섬 중부의 산속, 푸르른 논으로 둘러싸인 조용하고 소박한 예술가들의 마을이다. 19세기 말부터 발리의 문화에 매료된 전 세계 예술가들이 정착해 활동하면서 우붓만의 독특한 문화가 발전했다. 힌두교를 믿는 순한 사람들이 울창한 자연의 품에 안겨 아름다운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시골의 매력이 넘치지만,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외국인들이 만드는 색다른 문화가 반전의 매력을 선사하는 곳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힐링을 위해, 휴식을 위해, 또 요가를 위해 우붓을 찾으며 그랬다가 우붓에 홀딱 반해 정착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나 역시 2주간 발리 여행을 갔다가 우붓과 사랑에 빠졌다. 발리를 여행하며 우붓을 생략하는 사람도 많지만 일단 우붓의 매력을 발견한 사람은 정신없이 사랑에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나처럼.
지금부터 결혼한 여성, 아내이자 엄마였던 한 사람이 결혼을 잠시 멈추고 우붓에서 보낸 행복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 잠시 멈춤과 행복했던 시절은 결혼이 내게 끈질기게 물었던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 결혼을 위해, 늦었지만 결혼 '자체'에 대한 회의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내게 필요한 진짜 모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혼, 잠시 멈춤.
칙칙폭폭 앞만 보고 달리던 결혼 기차에서 잠시 내려 허름한 역에 우선 섰다. 그곳에서 이 철길의 끝을 그려본다. 혹은 기차 밖에서의 삶을 살아본다. 그것이 바로 내가 모험을 떠났던 이유이자 이 결혼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다.
Main Photo by Beatriz Pérez Moy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