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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한 마디에 그렇게 흔들렸지요

우리는 다른 차원을 산다

by 아리




해거름에 식탁에 앉아 바라보는 마당에는 초록도 다양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삐죽삐죽 솟은 잔디가 억센 초록이라면, 그사이 빼꼼 튀어나온 이름 모를 잡초는 더 야들야들한 초록이다. 구석에 민망한 듯 가시를 내밀고 홀로 서 있는 선인장은 연하고 차분한 초록이고, 토토로 우산처럼 거대해 담을 다 가리고 있는 커다란 잎사귀들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흐느적거리는 굼뜬 초록이다. 그 아래 키 작은 풀들은 골이 잔뜩 난 초록이고, 그보다 작은 난쟁이 풀들은 빨강 노랑 이파리와 뒤섞여 신이 난 초록이다. 망고 씨 심은 자리에서 올라와 제법 어엿하게 자란 망고나무 잎사귀들은 저 높은 곳에서 당당한 초록 이파리들을 뽐내고 있다. 담 너머 코코넛 나무에 열린 아기 코코넛은 갓난아기 머리처럼 만지기도 조심스러운 부드러운 초록이고, 저 멀리 논을 지나 하늘과 부드럽게 뒤섞여 우뚝 서 있는 야자나무들은 멀리까지 은은한 초록을 내뿜고 있다. 초록도 이렇게 다양한데,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식고 온갖 초록도 숨을 고르며 어둠을 맞이하려 할 때, 구름 낀 하늘에 구멍이 나 잠깐 해가 나오는 그 짧은 순간, 모든 초록이 살아나 살랑거리며 그 마지막 빛을 들이마신다. 이미 차분해졌던 초록들이 해거름에 어울리지 않는 달뜬 빛을 내뿜는다. 그 짧은 순간, 초록도 나도 시간을 잊는다. 식탁에 앉아 잠시 고개를 들어 우연히 그 달뜬 초록을 만나면 우리 집 앞마당이 어딘가 다른 차원의 세상처럼 낯설다. 그 짧은 낯섦은 금방 사라지고 초록은 다시 평범한 어스름에 잠긴다. 초록도 저렇게 시시각각 변하는데,


어느새 모든 초록이 빛을 잃었다. 시커먼 실루엣만 남아 또 내일 치의 초록을 부지런히 만들겠지.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서 스르륵 어둠에 잠기며, 그 달뜬 초록의 순간처럼 내 삶도 잠깐 어딘가 다른 차원에 다녀온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어쩌면 다른 차원의 삶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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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아이한테 연락이 왔다! '엄마! 오늘 친구 집에서 자고 갈게!'


마침 그도 짧은 여행을 떠나 있었다.



갑자기 홀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달콤한 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 대충 저녁을 해결하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오랜만에 혼자 걷고 싶었다. 시내 구석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몽키 포레스트 로드를 걸었다. 종일 사람들 발에 차여 초라해진 짜낭을 보며 느릿느릿 걸었다. 짧은 시간이 아쉬워 밤에도 부지런히 걷는 여행자들 틈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부러 발걸음을 세며 천천히 걸었다. 나는 아직 시간이 있으므로.


익숙한 언어와 낯선 언어가 바람처럼 스쳐갔고 마지막 손님을 맞으며 돈을 세고 가게를 정리하는 피곤한 얼굴들을 느리게 지나갔다. 밤참을 실은 간식 오토바이 주변에는 택시 운전사들이 모여 하루의 이야기로 배를 채우고 있다. 관광객들에게 종일 손을 내밀다 어디론가 터벅터벅 걸어가는 집 없는 아이의 뒤를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남편의 손을 꼭 잡고 걷는 중년의 이브닝드레스가 앞에 있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Wherever you go, whatever you do, I will be right here waiting for you.

당신이 어딜 가든, 무얼 하든, 나는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는 삶을, 그토록 아름답게 부르는 건 반칙이다. 리처드 막스! 잘생긴 당신의 얼굴로도 그 가사는 좀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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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의 발걸음에 섞여 나도 오랜만에 여행자가 된 느낌이다. 새로운 곳이라는 설렘,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조바심,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느끼는 기분 좋은 긴장감. 그렇게 걸었던 곳들이 생각났다. 그의 손을 잡고 사람 물결에 휩쓸려 걷던 카오산도, 졸리다 못해 깊은 잠에 빠져버린 아이를 업고서도 끝나지 않길 바랐던 피렌체의 밤 골목도. 지금 우붓을 걷고 있는 발들도 돌아가서 나처럼 이곳을 추억하겠지. 잠들기 아쉬워 늦도록 걸었던 우붓의 밤거리를, 그들만의 우붓을 떠올리겠지. 등산화를 신고 남자 친구 손을 꼭 잡고 절룩거리는 발을 보니 그 발의 수고로움이 내게도 전해져 갑자기 노곤한 피로가 몰려왔다. 훠이훠이 오토바이를 찾아 타고 이미 오래전에 컴컴해진 골목을 굽이굽이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삶과 여행이 뒤섞인 우붓에서의 삶. 여기가 내 집이라 나는 좋은데, 우붓의 밤이 손 내밀면 잡히는 지금이 나는 좋은데, 이 다른 차원의 세상이 내가 있는 곳이라 나는 이렇게 좋은데, 그는 점점 들썩이기 시작했다. 마침 6개월에 한 번씩 재입국해야 하는 사회문화 비자도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입국 심사가 점점 까다로워졌고 그는 공항에서 매번 마음을 졸여야 하는 그 불안한 상태를 견디지 못했다. 그는 또, 일에 지쳐갔다. 한국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전에 지쳤다면 여기서는 열정을 쏟을 대상 없음에 지쳐갔다. 그에게 우붓은 지루한 시골 촌구석. 그는 조금 더 큰 판을 원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졌다. 불쑥 모든 일을 내려놓고 혼자만의 여행을 선언했다. 잘 다녀오라고 등 떠밀었다. 사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더 이상 우붓에서 살 수 없다 했다. 새로운 것은 늘 설레지만, 우붓을 대신할 새로운 곳이 과연 내게 있을까. 그는 기어이 나를 또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나는 혹시나 뽑힐까 뿌리를 바짝 내리고 있는 앞마당의 연약한 잔디 같은 심정으로 그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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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와 말했다. "우리 떠나자."


그 : 나 먼저 가 있을게.


그녀 : 어디로 갈 건데?


그 : 모르겠어. 가서 찾아볼게.


그는 단호했다. 나는 우붓을 떠나기 싫었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가 모험을 할 차례였다. 내가 선택한 우붓으로 그를 데려왔으니, 그에게도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했다.



그녀 : 그래, 어디든 가. 금방 따라갈게.



그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내가 남아 우붓에서의 삶을, 충만했던 생활을, 아이가 사랑했던 학교와, 쥐가 나오던 집과, 큰 맘먹고 장만했던 차를 정리하기로 했다. 우붓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얼마 남지 않은 삶이 내게 묻고 있었다. 이 갈림길에서 너의 선택은 무엇이냐고. 물론 진심을 속이고 핑계를 대면서, 그를 따라가지 않고 우붓에 더 머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솔직하고 싶었다. 내 마지막 진심이자 자존심이었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지치지도 않고 줄기차게 했던 결혼에 대한 이 고민을, 이제는 정리해야 했다. 아니, 정리하고 싶다고 정리할 수 있는 고민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동그랗고 아름답게 자랐다.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이유, 살기 싫은 이유는 저마다 많았지만, 아이가 부모 중 한 명과 함께 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동그랗고 예쁜 아이가 끝나지 않는 이 고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이 자리를 조금 더 지키게 만들었다. 역시 아이 이기는 부모는 없다. 게다가 엄마보다 아빠를 훨씬 많이 닮은 아이에게는 나보다 그가 더 필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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