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회오리는 지나갔나 봅니다
결혼이라는 기차에서 잠시 내려, 우붓이라는 허름한 역에 섰다. 그곳에서 가장 나다운 나를 찾았고 내가 빠져나온 사회를 살폈다. 겨우 그것이 내 모험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 모험이 결국 내 삶의 가장 화려한 페이지가 되었다. 안주했다면 얻지 못했을 경험이었고 덕분에 내게 가장 어울리는 장소도 찾았다. 우붓이었기에 그 복잡한 고민의 와중에도 삶을 즐기며 미래를 기대할 수 있었다.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모험이 있다. 내 모험의 초라한 시작은 카페 구석 테이블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함께였다. 부지런히 나를 살피며 내가 원하는 삶을 그렸다. 커피 테이블은 도서관도 될 수 있고 직장도 될 수 있다. 혼자만의 작업실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용기 있게 떠난 길 위일 것이다. 그렇게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 나서는 것부터 당신의 모험을 시작하길 바란다. 잠시 멈추든 속도를 높이든 각자의 모험은 각자가 정한다. 결혼하지 않는 것, 아이를 낳지 않는 것, 색다른 명절 풍경을 만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나만의 일을 찾고 만들어보는 것, 이혼을 축복으로 여기는 것 역시 삶의 모험이 될 수 있다. 나는 결혼을 잠시 멈추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본 것뿐이다. 불가피한 이유가 아니면 부부는 같이 살아야 한다는 시선을 벗어던지고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룬 것은 당연히 없다. 하지만 내가 해온 모험이 있고 내가 만들어 간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삶이 푸짐한 거름이 될 것을 믿는다. 나에게도, 뒤늦게 자기만의 모험에 뛰어든 남편에게도, 그리고 그 모험 안에서도 무럭무럭 자란 딸에게도. 모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의 굳건한 편견도 옅어질 것이다. 그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그런 세상을 꿈꾼다.
말레이시아 조호바루, 새로운 보금자리다. 그곳에서 자동차로 세 시간, 아이의 학교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둘이 여행을 떠났다. 텁텁한 황톳빛에 퀴퀴한 냄새까지 풍기는 믈라카 강변을 걷고 있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산책하자고 아이를 끌고 나온 참이었다. 아침인데도 생각보다 해가 강했고 산책을 시작하자마자 오래 걷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이미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분명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더워 죽겠네. 나 혼자 들어간다고 할까? 그냥 같이 걷자고 하겠지?’
그때쯤 내가 말했을 것이다. “덥다. 그만 들어가자.”
아이가 답했다. “You are normal, sometimes. 엄마도 평범해, 가끔은.”
그렇다면 나는 대부분 평범하지 않다는 뜻이렸다. 웃으며 칭찬으로 덥석 받았다. 노란 머리, 큼직한 타투, 등이 홀라당 파인 드레스를 입고 아빠가 아닌 남자들 품에 안겨 춤을 추는 엄마라니. 엄마라는 옷을 헷갈리게 만드는 사람. 한 가지로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사람. 내가 그런 엄마라서 좋다. 그런 여자라서, 그런 사람이라서 좋다. 이렇게 사는 어른의 시간이 좋다. 모험하는 어른이 되길 잘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어른도 가까이 보면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공평한 삶을 최대한 누리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것만큼은 나도 남들처럼 평범하다.
8학년이 된 아이의 진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디서 살고 싶은지, 또 이사를 해야 하나, 혼자 보내야 하나, 두서없이 대화를 나누던 중 아이가 물었다.
“근데 다 같이 갈 수 있어?”
아빠가 덥석 받았다. “그럼! 이제 아빠는 어디서든 돈 벌 수 있는 사람이야!”
결국 우붓에서의 삶이 그에게도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자기만의 속도로 부지런히 자기 삶의 방향과 속도를 살폈다. 우물에서 벗어나 흐르는 강물로 뛰어들 자신감을 얻었고, 한동안 쉬었던 만큼 체력을 보충해 하고 싶은 일도 시작했다.
그와 조금씩 비슷해진다. 그의 세상이 넓어지고 있다.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 같던 평행선이 간혹 춤을 춘다. 이러다 가까워질 수도, 또 멀어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약간의 기대가 생긴다. 하지만 기대는 가벼워야 할 것이다. 풍선처럼 터지더라도 실망하지 않도록. 결혼도 관계도 살아 꿈틀거리길 바란다. 결혼이 삶의 완성은 아니다. 동사무소 구석에 처박힌 서류 한 장이 결혼의 족쇄가 될 필요도 없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처럼 그와 나의 관계도 무럭무럭 자라 풍성해지길 바란다. 아이는 자라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날 것이고 우리는 함께 늙어가겠지만 그것이 우리 앞에 펼쳐진 결혼이라는 책의 전부가 아니길 바란다. 해피엔딩은 해피해서 좋고, 반전은 반가워서 좋지 않은가.
안식 휴가는 결혼에 자유를 부여하는 한 방법이다. 그것은 결혼의 틀을 좀 더 유연하게 만들어 더 넓은 공간을 부여하고 결혼이 안으로부터 변화하도록 만든다. <결혼 안식년>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우리는 변했고 함께 있는 지금도 변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들고 있는 결혼이라는 책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 될 것이다. 십 년 후, 이십 년 후, 우리 책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지고 있을지 궁금하다. 미래는 가능성이다. 삶이 확실의 반반한 트랙에서 벗어나 불확실의 수풀을 헤치며 달릴 때 나는 더 살아 있는 사람이 된다.
요가반, 밤잠까지 설쳐가며 들었던 아침 일곱 시 반 수업. 벡스의 말이었다.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고 싶은 것들, 그런 것들이 많을수록 삶이 다채로워진다. 해야 하는 일들을 촘촘히 엮어가는 삶도 든든하고 튼튼하지만,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고 싶은 일들이 삶의 독특한 무늬가 되고 색이 된다. 그래서 쓰지 않아도 되지만 쓰고 싶었다. 나처럼 철들지 않는 인간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서 이 글을 썼다. 그들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응원이다.
나는 나의 무대로 되돌아간다. 다시 나의 기차에 올라탄다.
잠시 암전이 되었지만 무대는 곧 밝아질 것이고, 쉬었던 기차도 곧 출발할 것이다.
무대의 빛이 밝아온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리듬과 함께 삶은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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