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가끔은 더 외롭고 싶어요
요 노 세 마냐나 Yo no se manana 난 내일은 몰라요.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라틴음악 속으로 빨려 들었다.
난 내일은 몰라요.
우리가 함께 일지, 세상이 끝날지…….
내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오직 너와 나.
순간을 살자.
내일은 모르니까.
내일은 모르니 오늘을 즐기는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오랜만에 만난 앤의 옆에 앉았다. 금발 머리 앤은 호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은퇴하고 발리로 건너와 살고 있었다.
“어떻게 지냈어?”
“바빴어. 어쩌다 강아지 한 마리를 잠시 돌보게 돼서 통 나갈 수가 있어야지. 너무 귀여워. 마침 오늘 밤만 친구 집에 맡겨서 시간이 났지 뭐야. 여전히 마데도 만나고 있고.”
발리로 오기 전 남편과 헤어진 앤은 발리 사람 마데를 사귀고 있었다.
“마데는 어때? 잘 지내?”
“응, 잘 지내긴 하는데, 요즘은 좀 힘들어. 꼭 투덜이 스머프 같거든. 식당 일을 도와줘도 투덜, 안 도와줘도 투덜. 늘 그랬지만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는 거지 뭐. 발리 남자잖아. 요즘은 내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자주 해. 그래서 더 행복해지고 싶어. 얼마 안 남았는데 불행할 시간이 어딨어. 안 그래? 넌 어떻게 지내? 남편이 오니까 더 좋아? 그가 오기 전보다 더 행복해진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지금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 춤을 추면 행복해. 순간의 행복을 찾는 법은 이제 좀 알겠어. 하지만 그 충만함이 삶 전체를 밝혀주는 건 아니더라고. 남편과는 여전히 삐걱거리지. 새로운 곳에 왔다고 누구나 새로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
앤이 말을 이었다.
“집에 있는 남편은 여전히 알코올 중독으로 힘들어해. 처음 헤어졌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그런 상황이야. 아이들이 잘 챙겨서 다행이고.”
그녀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지만, 자로 잰 듯 깔끔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여성들이 느끼는 감정은 죄책감일 것이다. 헤어졌기 때문에 술에 의존했든, 술에 의존했기 때문에 헤어졌든, 알코올 중독인 남편을 내버려 두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성, 한국 사회에서는 존재하기 힘들다. 결혼하고 오래 함께 살며 아이들을 키웠다 해도, 어느 순간이든 서서히든 마음이 떠나면 (남편과 함께 있는 게 더는 행복하지 않아서, 가 앤이 그와 갈라선 이유였다) 미련 없이 서로의 행복을 찾아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 한국 사회에서는 역시 존재하기 힘들다. 주변인들의 손가락질은 당연할 것이고 자신도 사회가 심어놓은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남편 역시 버려졌다는 비참함을 떨치기 힘들 것이고.
물론 앤은 그가 조금 안쓰러울 것이고 남편은 그녀에게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아이들이, 사회가 바라보는 관점은 일관된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스스로 꾸려가고 개척하는 것. 독립된 개인의 선택. 결혼 제도 안에서도 굳건히 존재하는 나와 너의 분리. 함께 있을 때 행복하면 함께 있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유로 결혼을 지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공통의 인식. (물론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나 탄탄한 사회보장 제도 등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결혼이 어떤 이유로든 개인의 행복을 제한한다면 결혼에 대한 새로운 서사가, 새로운 상상력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은 다시 호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해. 여기 있는 동안 대부분 혼자거든. 친구들도 많이 돌아갔고. 그래서 마데와의 관계도 힘들지만 정리하기 힘든 것 같아. 게다가 멜버른과 시드니에 흩어져 살던 아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대. 그러니까 더 집에 가고 싶어 져. 아이들도 자주 만나고 곧 손자들도 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조금 외로운가 봐.”
나는 혼자라 외롭다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내가 가끔 간절히 바라는 것을 그녀는 간절히 떨쳐 버리고 싶어 했다.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더는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헤어져 발리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지만, 여전히 외롭다 한다. 그렇다고 그냥 참지, 외로울 걸 왜 헤어졌니, 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고독도, 고독을 감당하는 것도 결국 개인의 선택이므로. 외롭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함께 살기 싫은 건 싫은 거고 외로운 건 외로운 거다. 아무리 외로워서 아내가 있는 발리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고 해도, 남편과 헤어지지 말지 그랬어! 라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인간은 어차피 외롭다. 선택은 불가피했고 선택 이후의 상황은 또 거기서부터 헤쳐나가면 된다.
“잊지 마! 무엇보다 네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외롭다면서 오히려 내게 행복하라는 그녀의 말에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궁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아리! 이리 와! 춤추자!”
나는 춤을 추며 내게 묻은 그녀의 외로움을 대신 털어주고 싶었다. 아니, 그녀가 털어버릴 외로움을 몰래 주워 담고 싶었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 사실 조금 외롭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