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gentle
Be wise
Be true
Be you.
Namaste.
친절하고 지혜롭고 진실하라. 그리고 네가 되어라. 나마스떼.
요가반, 뽀글뽀글 금발 머리 벡스의 수업이었다. 저렇게 쉬운 단어들로, 저렇게 짧은 말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기술. 요가 지도자 과정에서 그런 것도 배우나 보다. 벡스의 말에 나는 기꺼이 무너졌다. 내게 꼭 필요한 말을 언젠가 어디선가 반드시 듣게 되는 마법. 그것이 우붓의 마법 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이 그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건지도 모르고. 우주의 섭리나 우연이 일치, 뭐래도 좋다. 그래서 우붓이 좋고 우붓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고 그들이 모여 만들어가는 우붓이 좋다.
Be You. 네가 되어라.
착한 아이가 되어라. 모범생이 되어라. 능력자가 되어라. 자상한 아내가 되어라. 좋은 엄마가 되어라. 그 목록이 과연 끝나기나 할까. 심지어 나는 생물학적 한계까지 넘어 집안의 아들까지 되어야 했다. 그 많은 말 중에 ‘네가 되어라.’는 말은 왜 없었을까. 왜 세상의 어떤 곳에서는 전부 네가 되어라, 고 하는데 내가 살던 곳에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여행 가방 없이 작은 핸드백 하나만 메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남자와 여행을 떠났던 클라라 벤슨은 <여행 가방은 필요 없어 No baggage(내가 번역한 책이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대 팔천만 구성원들이 전부 과분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면, 그건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숟가락으로 떠먹여 진 문화적 메시지를 너무 철석같이 믿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넌 특별해! 네 행복을 찾아!'
클라라는 그런 믿음을 갖고 사회에 나왔지만,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취업난, 암담한 미래, 목표 상실로 오랜 정신적 방황을 겪었다. 나는 특별하지도 않고 삶에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 과정이었다. 클라라가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었지만 삶이 예상대로 펼쳐지지 않아 좌절했다면, 나는 그런 믿음조차 가져보지 못했다. 그녀가 그 부작용으로 무너졌다면 나는 그것의 결핍으로 무너졌다. 내가 자란 곳은 시작부터 달랐다. 누구 하나 특별해질까 전전긍긍했다. 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것을 원하고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런 시대였고 사회였다. 클라라가 자란 곳과 달리 내가 자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는 개인보다 공동체에 이바지할 사람을 원했다. 개성을 버리고 잘 들어맞는 톱니가 되길 원했다. 자신이 되는 것 따위 관심 없는 사회였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에서부터 나 자신보다는 자식의 도리, 엄마의 소양, 아빠의 의무만 강조되었다. 안타깝지만 나라를,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아니, 여자로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인가. 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내 손을 꼭 붙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우리 손녀 왔는가. 니가 느그 집에서 아들 노릇 해야 헌다잉. 느그 집에선 니가 아들이다잉.” 처음엔 쭈글쭈글한 할머니 손에 잡힌 내 손을 빼내고만 싶었다. 나이가 들고 그 말뜻을 이해할 즈음에는 어색한 웃음만 지었고, 다행히 뭐라고 대꾸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에 할머니는 그 말씀을 그만두셨다. 저놈은 아들 노릇 할 그릇이 아닌가 보다 포기하셨는지도 모르고. 박준 시인의 말대로 대부분의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귀에서 죽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할머니의 말은 아무래도 낫지 않는 상처처럼 뭔가를 계속 조금씩 흘렸다. 나는 그래, 결심했어! 집안의 기둥이 되자! 라고 다짐하기는커녕 하루빨리 집을 떠나고만 싶었다. 상처는 내내 축축했다. 그 상처로 내 정체성이 빠져나가고 여성성이 흘러내렸다. 나는 톰보이가 되었다. 치마를 입지 않았고 예쁨을 낭비했다. 한 인간이면 될 뿐 여성일 필요는 없다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움보다 더 큰 삶의 의미를 찾자, 여자보다 인간으로 살자 생각했다. 바보처럼 그게 선택의 문제인 줄 알았다.
벡스의 주특기는 연꽃 무드라. 무드라 Mudra는 호흡이나 명상, 요가를 할 때 몸에 흐르는 기를 잘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손의 모양이나 위치를 뜻한다.
"자,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읍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자연스럽게 호흡하세요. 이제 엄지와 새끼만 붙이고 나머지는 활짝 폅니다.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내 안의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깊고 강한 에너지가 꽃을 피웁니다. 그 꽃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립니다. 활짝 핀 꽃의 기운을 느껴보세요."
고요했다. 눈을 감으니 조용히 들고나는 내 호흡과 나만 존재했다. 맞닿은 엄지와 새끼가 한 송이 꽃을 피웠다. 내 손에서도 피었지만, 그 순간 내 안의 씨앗도 꽃을 피웠다. 늘 아직이라고, 부족하다고, 씨앗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미 활짝 핀 꽃이었다. 물컹한 아랫배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가슴을 데우고, 머리 위 활짝 핀 꽃으로 올라가다가 두 눈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에도 온도가 있다. 하품할 때 나오는 눈물이나 드라마를 보며 흘리는 눈물보다, 저 깊은 곳에서 왈칵 쏟아지는 눈물은 처음부터 뜨거웠다. ‘아, 나는 이미 꽃이었구나. 씨앗도 아니고 봉오리도 아닌, 벌써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이었구나.’ 감은 두 눈, 머리 위의 꽃 한 송이, 뜨거운 가슴과 그만큼 뜨거운 눈물. 고요했던 그 순간, 나는 활짝 핀 한 송이 꽃이었다.
“자, 이제 두 눈을 뜨세요.” 벡스의 말에도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활짝 핀 꽃을 느끼고 싶었다. 계속 꽃이고 싶었다. 눈을 뜨면 갑자기 시들어버릴까, 바람에 날아가 버릴까 두려워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수업이 마무리되었고 옆에서 주섬주섬 요가 매트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기 전에 다시 한번 다짐했다. 잊지 말자고. 넌 이미 꽃이라고, 활짝 핀 꽃이라고.
Be you. 네가 되어라. 네가 바로 꽃이다.
이 말을 듣기 위해 우붓에 온 것일까. 뜨거운 눈물을 닦고 밖으로 나오니 눈물만큼 뜨거운 해가 중천에 떠 있었고 요가반 구석에 꽃들이 피어있었다. 더 예쁜 꽃 덜 예쁜 꽃 없이 저마다 제 자리에서, 참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