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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냉동고를 사다니요

그와 그녀, 먹고사는 것에 관하여

by 아리




"우리 냉동고를 사야 하지 않을까?" 어느 날 문득 그가 말했다.


"냉동고? 그래, 있으면 좋긴 하겠지."


처음에는 세탁기도 빌려 썼지만, 꼭 필요해 가져왔는데 보관이 어려운 냉동식품은 이웃집 냉동고에 보관하기도 했다. 그거야 식구가 둘일 때는 괜찮았지만 셋이 되고 나서도 남의 집 냉동고와 세탁기 신세를 지는 건 조금 민망하지 않은가.


둘에서 셋이 되면서 방은 한 칸에서 두 칸이 되었고 그에 맞춰 가구와 살림이, 특히 부엌살림이 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품목은 바로 냉동고. 오랫동안 먹을 음식을 한가득 보관하는 냉동고는 내게 안정과 정착의 상징이었다. 거실 한구석에 윙윙 돌아가는 냉동고가 있다는 말은 훌훌 털어버리고 또 떠나기 힘든 상태가 되었음을 뜻했다. 물론 우붓은 좋았다. 평생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무겁게 살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사랑하지만 얽매이는 것은 또 다르므로.


거실 한쪽을 차지한 육중한 냉동고를 보며 나는 결혼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대해, 부모 세대가 물려준, 냉동고처럼 굳건한 편견들에 대해 생각했다. 떠나기 전에 나를 불편하게 했던,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다시 눈앞에 떨어졌다. 이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먹고사는 문제가 다시 복잡해졌다. 엄마로서 아이를 먹여 키우는 일은 당연했으나, 가족 전체의 밥상을 차리는 일은 내게 당연하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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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정말 내게 어려운 분야였다. 관심도 없고 욕심도 없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요리를 싫어하는 결혼한 여자는 하자 있는 제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 가서 함부로 말도 못 한다.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고. ‘제가 한 요리를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서 큰 행복을 느껴요.’ 가 모범 답안이라면, 약간 점수는 깎이지만 그래도 괜찮은 답은 다음과 같다. ‘처음엔 못했지만 하다 보니 늘었고 재미도 붙었어요.’ 빨간 펜으로 확 그어지는 오답이 바로 내 답이다. ‘결혼해도 여전히 요리를 잘 못 하고 관심도 없어요.’ 낙제다. 끝까지 재수강을 권유당한다. ‘못하는 게 아니라 정성이 없는 거야. 뭐든 정성을 들여서 하면 결국 잘하게 되어 있어.’ 이런 잔소리나 들으면서. 그런데 왜 안 되는가.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이다. 왜 요리를 싫어하면 안 되는가. 겨우 질문은 했지만 답을 찾을 곳은 없었다. 답과 상관없이 당장 하기 싫은 건 싫은 거였다. 게다가 나는 싫은 건 또 못하는 인간이다. 잠시 시댁에 살 때는 고민도 사치, 그냥 내 일이라며 꾸역꾸역 해치웠다. 틈틈이 여행 갈 때마다 가장 기뻤던 건 공식적으로 세 끼를 사 먹어도 된다는 거였다.


처음 우붓에 정착했을 무렵, 아이는 그야말로 무럭무럭 커야 할 때였다. (다양한 음식을 골고루 잘 먹어야 할 때였다) 물론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아리, 지금이니까 하는 말인데 초창기에 아리 집에 갔다가 아이랑 둘이 김치랑 김이랑 멸치, 계란에 밥 먹는 모습이 참 안타까웠어요.”


‘뭐라고? 김치랑 김, 멸치에 계란까지? 그 정도면 진수성찬 아닌가?’ 옆에서 또 다른 친구가 거들었다.


“아리, 전라도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전라도 여자치고 아리만큼 요리에 관심 없고 못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다행히 아이는 뭐든 복스럽게 잘 먹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해준 요리를 염치도 없이 꿀떡꿀떡 받아먹었다. 그리고 무럭무럭 컸다. 이 기회를 빌려 그때의 이웃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들의 넉넉한 정이 있었기에 나는 멸치와 계란과 김으로도 아이의 폭풍 성장 시기를 대충 버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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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을 처음 차린 건 결혼 후였다. 알콩달콩 함께 밥상 차리는 재미를 볼 수 없을 만큼 신혼부부는 바빴다. 나는 아이를 안고 동동거리며 퇴근하는 남편만 기다렸다. 갓난쟁이 아이를 돌보며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제때 상을 차려내는 것은 내게 우주 탐험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부당한 일이기도 했다. 일보다 육아가 어렵다고 생각했고,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내 저녁을 챙겨줬으면 했다. 그래야 한 끼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었으니까. 그는 그대로 일하고 돌아왔을 때 밥상이 차려져 있길 원했다. 그렇게 처음부터, 가장 기본적인 먹고사는 일에서부터 우리는 삐걱거렸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는 어린이집으로, 우리는 둘 다 일터로 나갔다. 그렇다면 누가 밥상을 차려야 하는가? 여자인 내가? 아니면 그보다 돈을 덜 버는 내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 였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한동안 찾지 못했다.


그러다 어떤 글을 읽었다. 요지는 이렇다. 우리는 모두 독립된 개인이다. 결혼해도 개인의 독립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가족이지만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기본적인 생활을 전부 책임질 필요도 없고 책임져서도 안 된다. 개인은 가족을 이룬 후에도 엄연한 개인이어야 하고, 개인은 기본 생활을 스스로 꾸려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예를 들었던 건 플랫 메이트였다. 같은 집에 살지만, 함께 있어 재밌고 즐겁지만 자신의 생활은 자신이 꾸려가는 것. 한 구성원이 돈을 많이 번다고 집안일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버는 돈의 양에 상관없이 자기 일은 스스로, 공동의 일은 공평하게 나누어서 한다. 결혼 전, 공간을 공유하는 싱글들의 생활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그 공감이 힘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왜, 우리는 결혼에서 그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가. 독립된 두 개인의 생활에 결혼이 개입된다고 이야기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 같이 일을 해도 누구는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눕고 누구는 부엌으로 종종 달려가는 일은 생기지 않아야 한다. 물론 결혼에는 그것 말고도 개입되는 문제가 많다. 서로의 가족, 끈질긴 가부장제, 공평하게 나눌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한국의 직장 문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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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에 관심 없는 나와 달리 남편은 요리를 제법 좋아했다. 특히 내가 싫어해서 잘하지 않는 고기 요리는 늘 그의 담당이었다. 제육볶음은 눈감고도 뚝딱하고, 닭백숙도 수준급이며, 손님을 초대할 때는 늘 요리사가 된다. 나는 마트에서 부엌 용품 코너에 가장 관심이 없지만 그는 무조건 그곳으로 직행해 새로 나온 신박한 용품이 없나 확인했다. 프라이팬을 바꿔야 할 때를 정하는 것도 그였다. 하지만 설거지는 죽도록 싫어했다. 설거지야 내가 명상하듯 하면 그만이니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 정도면 괜찮은 남편감이라며 내가 만족하고 감사하면 더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의 이벤트와 지루한 일상은 엄연히 다르다. 문득 요리하고 싶은 신나는 마음과 꼬박꼬박 돌아오는 끼니 해결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우붓에서,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육아는 수월해졌다. 둘 다 틈틈이 일했지만 밥때만 되면 여전히 불편했다. 누가 부엌으로 가느냐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다 그냥 할 수 있는 사람이, 먹고 싶은 메뉴가 확실한 사람이 차리는 방식으로 자리가 잡혔다. 서로 다른 식성까지 언급하면 너무 복잡해지니 우선은 여기까지만.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를 하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만든다. 함께 또 각자 요리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 만든 음식을 사이좋게 먹는다. 설거지는 게임을 할 수도 있겠지. 그런 생활을 하고 싶다. 누군가 힘이 빠져 쓰러질 때까지 일해야 하고, 그래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 돌아와 누군가 밥을 차려주지 않으면 라면 봉지를 뜯어야 하는 상황은, 여기서는 없었으면 좋겠다. 독립된 개인이 되어 어느 것 하나 다른 이에게 온전히 의존하지 않고, 일과 삶의 균형을 잡고 자신도 적당히 돌볼 수 있는 그런 삶을 원한다. 그 새로운 삶이 여기서는 가능할까. 그와 나는, 우리는 과연 준비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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