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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이 제일 행복했어!

맥주 두 병의 마법

by 아리




괜히 피곤하고 우울한 날에는 고요히 하루를 보내고 일찍 자든가, 아예 술을 잔뜩 마시고 기절하든가 둘 중 하나가 좋다. 그야 당연히 대부분 후자를 선택하는데, 어차피 울적하고 피곤하니 상태 좋을 때 술을 마셔 피곤해지는 것보다 덜 억울한 마음이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자신을 속여가며 술을 마시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날도 아이 밥을 차려주고 맥주병을 땄다. 맛없는 반찬에도 늘 한 그릇 뚝딱 비우는 아이였지만 그날은 특별히 소시지를 삶아주었으니 신이 나서 배를 채우고 슬슬 내게 놀이를 걸었다. 영국 영어 흉내 내기 놀이라고, 저 혼자 말하면 나는 깔깔 웃기만 하면 되는 놀이였다. 심심할 때마다 <해리포터>를 봤던 아이는 내가 생각해도 영국 엑센트 흉내를 참 잘 냈다. 나는 맥주를 홀짝이며 배를 잡고 깔깔거렸고 아이는 그럴수록 더 신이 나 모노드라마라도 할 기세였다. 나도 따라 해 보지만 영 그 맛이 안 났다. 한 명은 너무 잘한다고, 또 한 명은 너무 못한다고 미친 듯 웃는 모녀라니. 맥주 한 잔에 긴장이 풀리니 별 것 아닌 것도 그렇게 웃겼다. 그렇게 한참 웃다 지친 상황에서 음악을 틀었다. 당연히 몸이 들썩였고 춤을 추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춤을 추다 보니 이상했다. 취한 건 난데 아이가 되려 더 흥분해 있다. ‘어머, 뭐가 저렇게 신나지? 나중에 술 먹고 다니다가 사고깨나 치겠는걸?’


사실 동네 사람들 북적북적 모이면 음악 듣고 춤추고 놀 만한 분위기가 금방 만들어진다. 얼큰하게 취하지 않아도 어느새 누가 기타를 치고 누가 동을 뜨면 너도나도 노래 부르고 춤추게 된다. 그런데 그날 밤은 아이와 단둘이었다. 나도 피곤한 상태였고 아이도 아파서 이틀을 결석했다가 겨우 학교에 다녀온 저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그런 마법이 일어났을까. 비 온 후의 상쾌함 때문이었을까, 오래간만에 말갛게 씻긴 공기 때문이었을까. 신나게 놀면서도 틈틈이 시계는 보다가 마침내 때가 되어 말했다.


"자, 이제 샤워하고 자자."


"그래!"


아이는 평소와 달리 조금 더 놀겠다는 반항 없이 순순히 샤워하러 들어갔다. 오, 이상하다. 싫어, 조금만 더 놀고, 안 졸려 등의 속사포가 오늘은 조용하다. 왜 그럴까? 욕실에서 들려오는 유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충분히 쏟아냈기 때문이겠지. 온전히 순간을 누렸기 때문이겠지. 아이가 침대에 누워 물었다.


"엄마는 발리에서 살 때 언제가 제일 행복한 하루였어?"


"음, 글쎄, 화이트 샌드 비치 놀러 갔을 때?"


"나는 오늘!"


갑자기 마음이 뻐근해졌고 동시에 뿌듯해졌다. 맥주 두 병으로 아이에게 가장 행복한 하루를 만들어 주었다니! 평소보다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몸을 움직였을 뿐인데.




나는 무수한 날들을 미래를 위해 보냈다. 대학 가면 이거 해야지, 생각하며 십여 년을 무심히 보냈고, 이 책만 끝내면 여행 가야지, 생각하며 하루하루 버텼다.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하면서 또 기다렸고, 나중에 발리 가면, 하면서 목록만 적어갔다. 그리고 하루하루는, 가장 중요한 오늘은 대충 우울하게 보냈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들 그러니 심각성도 못 느꼈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현재를 방기 한다. 영어유치원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현재는 온통 나중으로, 미래로, 뒤덮여 버린다.


이제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소시지 반찬 해놓고 맥주 두 병만 사면된다. 오늘이 가장 행복했다는 아이의 말을 듣고 피로와 술기운에 젖어 아이 옆에 누웠다. 돌이켜보면 나는 행복하다고 소리 내어 말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 말을 배우듯 아이의 말을 가만히 따라 해 보았다. 오늘 참 행복했다고. 지금 참 행복하다고. 어느새 그르렁 그르렁, 아이가 곱게 코 고는 소리에 나른하게 정신 줄을 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딸, 몇 수 앞을 내다봐야 하는 엄마는 그 행복이 참 불안하구나. 지금 엄마가 느끼는 행복은 어떻게 될까. 빠가 오면 말이야.



두둥! 2년의 기러기 생활을 청산하고 그가 우붓으로 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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