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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왔습니다

우붓으로 모인 가족

by 아리




그녀 : 이렇게는 더 못 살겠어. 일을 좀 줄일 수 없어? 딸 얼굴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은 나? 늘 자고 난 후에 들어오고 아침에 어린이집 갈 때는 자고 있잖아. 심지어 주말에는 더 바쁘고. 당신도 그렇게 일하는 거 힘들다며. 조금씩 하면서 살자.


그 : 조금씩으로는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어. 어떻게 구한 일인데 그래. 다 가족을 위해서잖아.


그녀 : 딸이 아빠랑 밥 한 끼 못 먹는 생활이 정말 가족을 위한 생활일까? 돈만 있으면, 먹고 살 걱정만 없으면 가족은 그냥 굴러가는 거야?


그 : 우리가 가진 게 뭐가 있냐? 하나도 없잖아. 아이는 계속 크고 돈 들어갈 데는 많을 텐데 지금 벌어야지. 지금 자리 못 잡으면 더 힘들어져. 다행히 일도 재미있고 나한테 맞는 것 같아. 이 세상에 내가 필요한 만큼만 벌고 쉴 수 있는 일은 없어. 내가 원하는 만큼만 벌겠다고 하면 갈 곳이 없다고.


그녀 : 남들이 다 그렇게 일한다고 우리도 반드시 그렇게 일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아무래도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아.


그 : 그래, 이 생활에 답이 안 보이긴 해. 이렇게 살다가 쓰러질 것 같기도 하고. 나도 힘들어. 하지만 답이 없잖아.


그녀 : 그러니까 답을 찾아보자고. 돈만 보면서 살지는 말자고. 적게 벌고 적게 쓰더라도 가족이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어. 가난하게 살아도 좋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자. 자기도 꿈이 있었잖아. 늘 음악 하고 싶어 했잖아. 돈은 좀 없더라도 여유 있게 딸 얼굴도 보면서 살자. 당신 꿈도, 내 꿈도 포기하지 말고.


그 : 꿈? 지금 이 나이에 꿈 타령을 어떻게 해. 음악으로 어떻게 먹고살아? 혼자면 몰라. 하지만 가족이 있잖아. 난 가장이잖아. 너는 왜 그렇게 철이 없니?


그녀 : 가족이 있어도, 가장이어도 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사는 사람도 많아.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아직 젊잖아. 원했던 대로, 원하는 대로,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을 거야. 살다 보면 지금은 상상하지 못하는 길이 보일 거라고.


그: 정말 그게 가능할까? 그러면서도 아이도 키우고 먹고살 수 있을까?


그녀 : 응. 그럴 수 있어. 난 떠나고 싶어.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 그러니까 우리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자. 아니면 세계여행이라도 가자. 어디든 떠나자.


그: 그래,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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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 힘들어! 힘든데! 돈이 벌리니까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해. 월급도 많이 올랐어. 아무래도 여기서 멈추는 건 너무 아까워. 아직은 아닌 것 같아. 사실 떠난 후의 계획이 하나도 없잖아. 어디서든 먹고 살 방법을 못 찾아 다시 돌아오면 그때는 어떡해? 모아놓은 돈도 없이 빈털터리로 돌아와 다시 바닥부터 시작할 수는 없잖아. 떠나서 뭘 할지, 어떻게 먹고살지,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녀 : 그러니까 더 나이 들기 전에 해 보자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적게라도 돈도 벌 수 있을 거야. 자기 일은 어디서든 할 수 있잖아. 지금 여기서만큼은 못 벌겠지만 먹고살 수는 있을 거라고. 자기 에너지면 못할 게 없어. 시작하기 전이니까 두려운 거야. 막상 해 보면 괜찮을 거고. 아이가 더 자라기 전에 온전히 함께 할 수 있는 기회잖아. 더 커서 학교 가면 그땐 더 움직이기 힘들어.


그 : 나는 영어도 못 하잖아! 두려워.


그녀 : 배우면 되지. 금방 배울 수 있어! 자기는 말하는 것도 좋아하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아하니까 금방 배울 거야. 가려면 지금 가야 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이가 학교 적응하고 우리도 더 나이 먹으면 지금보다 힘들어질 테니까.


그 : 그래, 그렇겠지. 나도 이렇게 일만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돈만 많으면 여행 다니면서, 기타 치면서 살고 싶어. 하지만 우린 돈이 없잖아. 가진 거 하나 없이 시작했잖아. 겨우 이만큼 왔는데 여기서 어떻게 멈춰. 그래서 지금은 안 돼.


그녀 : 왜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해. 그럼 언제쯤 준비가 될 것 같아?


그 : 글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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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 힘들다. 이렇게 우리 딸 얼굴도 못 보고 일만 하다가 내 인생 끝나는 걸까? 그래, 어쩌면 빨리 움직이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네 말대로. 가자. 나도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이왕 벗어나는 거 아예 새로운 일을 해 보고 싶기도 해.


그녀 : 그래! 무슨 일이든 좋아! 게스트하우스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


그 : 게스트하우스 좋지! 여행 가이드도 좋고!


그녀: 그래! 우린 잃을 게 없으니 더 뛰어들 수 있어. 분명 더 열심히 할 거야. 바닥부터 시작해도,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만 있으면, 정말 다 괜찮을 거야. 다 잘 될 거야.


그 : 좋아. 게스트하우스를 하려면 어디가 좋을까?


그녀: 찾아보자! 아이 학교도 찾아볼게!


그 : 그래, 더 늦기 전에 가자! 얼마나 준비하면 되지?


그녀 : 6개월 후 어린이집 졸업과 동시에 떠나자!


그 : 그래. 그럼 그만둔다고 곧 이야기해야겠네. 어디서든 우리 세 가족 잘 살 수 있겠지?


그녀 : 그럼. 다 잘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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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언젠가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우붓이 떠올랐다. 우붓에 있는 자연 속 조그만 학교도 찾았다. 싱그러운 공간에서 자유롭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 내가 살고 싶었던 곳, 아이에게 어울릴 학교. 그 두 가지면 충분했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학교에 돈부터 보냈다. 드디어 한 발 내디뎠다는 생각에 뿌듯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의 불안은 모험에 대한 내 욕망만큼 강했다. 나는 일 년쯤 세계여행을 다녀와도 먹고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고, 그러다 혹시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아도 그곳에서 충분히 새로운 삶을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더 성장하리라는 확신, 더 경험 많고 더 자신 있는 사람이 되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떠나기 전과 후의 우리는 분명 다른 사람일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여행의 힘을 믿었다. 여행을 통해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뒤흔들고, 세상을 달리 바라보게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의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새로운 우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안락한 집과 넉넉한 통장 잔고는 없겠지만, 미래에 새로워질 우리에게 지금의 고민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믿음이 그에게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자신을 만나는, 혹은 뒤흔드는 여행을 해 보지 못한 그에게 나의 말은 터무니없고 현실성 없고 대책 없고 철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으면, 그래 가자! 고 호기롭게 외쳤고, 며칠 후 정신을 차리면 말도 안 된다고 그 외침을 철회했다.

그 잦은 번복이, 나는 피로했다.


그 :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자신이 없어. 두렵고 불안해.


그녀 :......


어느 날 밤, 아이와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바람이 솔솔 불었고 아이는 아빠 손, 엄마 손을 번갈아 잡으며 종종 걸었다. 그때였다. 또다시 결심을 철회한 그에게, 내가 마지막 패를 던졌다.


“나라도 가야겠어. 자기가 안 간다면, 나라도, 당분간이라도, 떠났다가 돌아올게. 학비도 이미 보냈잖아. 2년 정도, 아이 학교 보내다 올게.”


둘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도 간절했다. 모험이 필요했다. 지금 이곳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 이국의 땅, 낯선 사람들, 새로운 사고방식, 무엇이든 ‘새’ 것이 필요했다. 다시 나다운 삶을 살고 싶었다. 이미 알아버린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결혼이 그런 삶을 방해한다면, 애초에 결혼부터 다시 생각해보고 싶을 만큼 나는 간절했다.


그렇게 추운 계절이 갔고 꽃피는 봄이 왔다. 이별의 시간이 왔다. 그가 눈물을 보이기 전에 먼저 등을 돌렸다. 공항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 아이가 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울지 않았다. 이별의 안타까움보다 나라도 먼저 갈 수밖에 없다는 비장함이 더 컸다. 그가 마주할 상황이 안타까웠지만, 우리가 없는 시간을 그가 알차게 보내길 기원했다. 사람들 좋아하고 사람들 틈에서 에너지를 얻고 사람들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가 홀로 자신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나는 모험을 떠나지만 그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 우울하겠지만, 뭉근한 성찰의 시간이 되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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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은 그는 정신없이 일했다. 종종 힘에 부쳤다. 그러다 두 달의 통 큰 휴가를 짜내 우붓으로 왔다. 그렇게 잠시, 함께 살아보며 새로운 삶을 가늠했다. 그리고 약간 방향을 틀어도 괜찮을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싹을 틔워 돌아갔다.


그 : 기다려, 내가 우붓으로 갈게. 아이는 거기서 더 행복한 것 같아.


그녀 : 그래, 어서 와. 자기도 더 행복할 수 있을 거야.


결국, 2년 만에 기러기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 지붕 아래 살게 되었다. 가족의 재탄생.


마음먹으니 일 처리는 금방이었다. 다 같이 한국으로 가 그나마 남아 있던 짐을 정리했다. 2주 만에 전셋집을 뺐고, 헐값에 차를 팔았고, 집 안 구석구석 묵은 물건들도 처분했다. 정신없이 사들였던 책은 사촌 동생에게, 어린이집 친구들에게 팔기도 하고 나눠주기도 했다. 다들 차를 가져와 한가득 짐을 싣고 떠났다. 손을 흔들며 속이 시원했다. 어깨에 얹혀 있던 돌멩이가 모래알처럼 가벼워졌다.


다시 셋이 된 우붓, 새집을 구해 이사했고 차도 장만했다. 얼마 없는 전 재산을 들고 온 식구가 우붓에서 아슬아슬 살게 되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단출한 둘에서 살림을 끌어안고 정착하는 셋으로 어쩔 수 없이 방향이 틀렸다. 이제 이곳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 그가 어디든 뿌리내리기 원했다면 나는 언제나 그 뿌리를 뽑아내고 싶어 했다. 이제 나의 모험은, 그리고 우리의 결혼은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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