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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주연 Dec 17. 2018

비를 좋아할 용기

리틀 포레스트, 2018



가끔 아무리 찾아도 없던 물건이 문득 나를 부르는 것처럼 한 번에 찾아질 때가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는데 문득 기억 하나가 나를 불러냈다.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여러 장면들이 있었지만, 비 오는 날 마루에 누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장면에서 기억은 나를 불러냈다. 

1초도 채 되지 않고, 그리 특별한 장면도 아니어서 그 흔한 스틸컷 하나 찾을 수 없지만 그 장면은 영화 내내,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나를 촉촉하게 적셨다.


그동안 내가 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세상은 비를 싫어하게 만들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튀기는 빗물, 빽빽한 지하철 속에서 옷을 축축하게 적시는 우산들, 사람에 치이기도 힘든 길거리에 우산끼리 치이고 치여 찡그려지는 표정들. 

이 도시에서 비에 대한 낭만은 사치였다. 

그건 사람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하늘의 말썽이었다.


하지만 마루에 누워 비를 멍하니 바라보던 '혜원'의 모습에서 난 그 시절의, 그곳의 비를 떠올릴 수 있었다.



혜원이 그리워 찾아간 집. 나에게도 그런 집이 있다.


그곳에선 귤나무가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해 가지를 정갈하게 다듬을 때, 누군가는 설렘을 가장한 쌀쌀함에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떠들썩하게 입학을 축하받는다. 

그렇게 한 해가 또 흐르면 나무의 열매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처럼 노랗게 불이 켜지는데, 그 달콤함은 누군가 철없던 시절과 이별해야 하는 씁쓸함을 달래준다. 


제주도. 우리 집 제주도. 

나에게 제주도는 집이다. 

'고향'은 그리운 곳이지만, '집'은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다. 

나에게 제주도는 아직까진 그렇다. 어떤 수식어를 붙이기엔 아직 멋쩍은 우리 집이다.


이제껏 만난 타지 사람들, 제주도식으로 표현하자면 육지 사람들은 제주도에 대해 다양한 추억과 환상들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제주도에서 왔다고 말하면 "와!"하고 감탄을 뱉고선, 반가운 기억들을 늘어놓았다. 

즐거웠던 여행, 맛있었던 식당, 아름다웠던 자연 풍경 등등.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내가 예상한 레퍼토리 그대로였으며, 나의 대답 역시 늘 똑같았다. 

매번 "그랬군요"하고 머쓱하게 웃어넘겼었다. 

그런 대화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뭐랄까, 수많은 환자들을 상담하며 매너리즘에 빠진 의사처럼 약간의 무심함을 친절함으로 애써 포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 첫 만남의 의례적인 과정들을 겪다 보니 대화 속 미묘하게 틈이 열리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제주도 사람을 만났다기보다는, 제주도를 만났던 것이다. 

나에겐 지극히 삶의 공간인 제주도가, 그들에겐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던 여행지였으리라. (혹은 효리네 민박) 

그래서 그들에게 제주도는 출렁이는 바다와 올록볼록 오름들로 둘러싸인 곳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알 수 없는 모양의 곡선들이 울퉁불퉁 새겨진 아이보리색 벽지로 둘러싸인 집이다.


그들의 추억 여행에 함께 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실 여행자들에게 유명하다는 장소들을 많이 가보지 못했다. 

흔히 말하는 맛집들은 더더욱 몰랐다. 

그래서 그들의 맛집과 내가 '제주도 소재'라는 공통점을 가졌다는 걸 발견한 그들의 눈빛이 너무나도 반짝였기에, 그에 맞는 응대를 하지 못해 줘 늘 미안하고 머쓱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지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그 섬을 떠나온 나는 열아홉까진 제주도 안 개구리였다. 

내가 아는 맛집은 친구들과 돈을 모아 먹던 허름한 떡볶이집이었고, 핫플레이스는 토요일 자습시간 중간에 땡땡이를 치고 갔던 학교 뒤 바다였다. 

물론 나에게는 추억의 뒷배경이 되어주는 소중한 곳들이지만, 만찬이 준비되지 않아 차마 여행자들을 초대할 수는 없다. 

이제 친구들은 '제주도 알못 제주도민'인 나를 잘 알아서,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며 나의 자문을 구하지 않는다.

가끔씩 필요에 의해 부르는 음성인식 AI 서비스처럼, 현지에서 들은 사투리를 통역하기 위해 내 이름을 부를 뿐이다.



제주도는 나의 삶이 있던 곳이고, 있는 곳이다. 


낮고 제멋대로 쌓인 모양이지만 늘 그 자리에서 견고한 돌담이 길을 안내하고, 풀과 나무들이 바람을 이리저리 타며 아무렇게나 자라 있고, 동네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겁도 없이 돌아다니는 동네. 

그 동네를 꼬불꼬불거리며 들어가면, 굳이 숨어 살지 않아도 숨겨지는 곳에 우리 집이 있다. 

집 마당의 작은 텃밭에는 엄마가 키우고 수확하는 상추와 깻잎들이 있고, 매일같이 먹고 싶던 요리들을 뚝딱뚝딱해내는 엄마가 있고, 텔레비전 속 VJ 아저씨의 주책에 익살맞게 웃으며 한결같이 빨래를 개는 아빠가 있고, 그 옆에서 오래된 카펫의 은근한 온기와 냄새 위에 누워 아빠의 웃음에 동조하는 내가 있다. 

나에게 제주도는 이렇게 별거 없이 따뜻한 집이다.


그곳에서, 그 시절에 살던 나는 비가 싫지 않았다. 


마루에서 다 같이 빗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던 그곳의 비는 음악이었다. 

평소보다 더 푸르스름하고 차가운 어둠에 눈을 뜨면, 비는 단호한 창문과 지붕을 두두두- 두드리고 있었다. 

흙과 풀 냄새와 함께 와서 머리를 차갑게 토닥거리며, 매일마다 다른 리듬을 들려주었다. 

자장가와 알람의 리듬을 마음대로 오가다가도, 세상에 망설임 없이 부딪히는 치열한 음악이 되기도 하고, 모든 소음을 잠재우는 고요한 음악이 되기도 한다.

비가 오면 먹고 싶은 음식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빗소리 장단은 허기진 배를 두드린다. 

비가 오는 날 시장은 컨테이너 지붕으로 뛰어드는 빗소리에 목소리가 커진 상인과 손님들로 더욱 시끌벅적하다. 

신발들이 지척지척 머금고 온 빗물을 다시 신발들이 머금고 간다. 

생선들은 물기가 반가운지 비릿함을 더욱 내뿜고, 엄마는 갈치구이로 저녁 메뉴를 결정한다. 


어쩌면 난 아직도 비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싫은 건 단지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이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아침이며, 어디서든 부대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다. 

비는 그냥 내리는 것이다. 

람이 도달할 수 없는 저 높은 하늘에서 사람 사는 이 땅으로 어쩔 도리없이 무기력하게 내려올 뿐이다. 


그 비를 싫어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나다. 

나에게도 혜원처럼 돌아갈 집이, 비를 좋아하던 시절의 그 집이 있지만, 난 결코 돌아갈 용기가 없다. 

그래서 난 계속 비를 싫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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