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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주연 Dec 17. 2018

달빛은 불면을 사랑하게 한다

20th century women, 2016

William : Must’ve been something good about Jamie's dad. 
Dorothea : He was left-handed. He could write with his left hand and scratch my back with his right.
William : And that's it?
Dorothea : I loved that.



영화 '20th century women'에서 윌리엄이 도로시아에게 전남편의 어떤 점이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 

그리고 도로시아는 그가 왼손 잡이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문을 보며 오른손으로는 자신의 등을 긁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그게 다야?"라고 물었고, 도로시는 덤덤하게 "그게 참 좋았다"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의 의도는 사실 도로시아가 전남편을 '그다지' 그리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 장면이 가슴 저릿하게 다가온 건, 적어도 도로시아는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전남편이 왼손으로는 할 일을 하고, 오른손으로는 자신의 등을 긁어주던 그 아침의 나른한 습관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계속 제자리에서 돌게 하던 힘을 이겨낼 강인함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아주 적은 가능성에 내 삶을 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별것 아닌 일들이 사랑에 있어서는 참 별 일이 된다. 

나의 지루한 습관을 그 사람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점도 반갑고, 나와 전혀 다른 습관으로 살아가는 것도 신기하다.


사랑에 대한 서론을 거창하게 늘어놓고 있는 이유는 도로시아가 좋아했던 남편의 나른한 습관에 '그게 다야?'라는 물음이 돌아왔듯, 내가 새벽을 밝혔던 그와의 대화에도 누군가는 물음표를 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 밤은 남자 친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여행 전 날이었다.

서로의 부지런함을 믿지 못했던 우리 둘은 공항 근처에서 같이 잤다가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

 

우리는 나란히 침대에 누워 서로에게 좋은 잠을 빌어주었다.

"잘 자"라는 말은 마치 명령어처럼 그의 머릿속 스위치를 껐고, 그는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최소한의 숨만 새근댔다. 

하지만 나는 밤을 새워가며 보냈던 시험 기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다. 

창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불면의 탓인 것 마냥 눈꺼풀을 질끈 감고 잠을 청했다.

 

잠을 아껴 공부해야 할 때는 쏟아지던 잠이 그것을 간절히 기다리기 시작하자 그림자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기다림에 목이 탔는지 물이 마시고 싶었다.

그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 숨을 참고 아주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예민한 그의 센서는 나의 움직임을 포착했고, 머릿속 불을 켰다.

 

그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자신의 입술에게만 말하듯 연약하고 흐릿하게 "잠 안 와?"라고 물었다.

깨운 것이 미안해 자장가처럼 “응”이라고 대답하고, 신경 쓰지 말고 더 자라고 말하려던 찰나에 그는 다시 물었다.

 

"같이 놀까?"

 

새벽에 잠이 깨는 피곤함과 몽롱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얼른 자'라는 말이 들려올 줄 알았다.

뒤척이는 상대 때문에 잠에서 깨버린 당사자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결에도 그는 알고 있었다.

'얼른 자' 이 말이 나에겐 명령어도, 자장가도 돼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꿈과 현실 사이를 비틀거리며 오가는 위태로운 순간에도 그는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그리곤 흘려보낼 언어가 아니라, 자신을 움직이게 할 언어를 찾아냈다.

그의 물음이 고맙고 예뻐서 앞으로도 종종 그의 잠을 깨우고 싶어 질 것 같았다.

 

불면의 놀이’는 그저 실없는 말장난뿐이었지만, 우리에겐 그런 의미였다. 

늘릴 대로 늘려보는 굿 나잇 인사.

잠들지 못하는 나에게 새벽의 놀이를 제안해 줄 사람과 함께라면 밤은 더욱 길고 어두워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낡은 정사각형의 그 방은 빛바랜 네온사인 빛이 들어와 스산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쩐지 그 순간을 떠올리면 그 빛이 달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주책 맞고 낭만적인 상상을 하게 된다.

태양의 빛을 받아 내려주는 달의 빛이 어두운 세상에 위로가 되듯, 잠결에 흘린 그의 말이 잠들지 못하는 나의 밤에 위로가 되었다.

달빛은 종종 불면을 사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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