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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주연 Dec 18. 2018

마주하는 이별

后来的我们 (먼 훗날 우리), 2018

팡샤오샤오: 그땐 서둘러 떠났는데 이번엔 제대로 작별인사 하자. 린젠칭, 잘 가.
린젠칭: 팡샤오샤오, 잘 지내.


세상에 "잘 가"라고 인사하며 헤어짐의 순간을 마주할 수 있는 이별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이별은 그것이 오는지도 모른 채 지나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먼 훗날 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이름을 부르고, 작별 인사를 건네며 이별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새삼 낯설지만 가슴 뜨겁게 다가온다.


매번 이별의 순간인지 모른 채 보냈던 인연들이 참 많다. 그중에서도 할머니와 이별하던 순간은 나에게 꽤 오랫동안 희미한 죄책감으로 남아있다.



아빠는 부모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고, 또 나는 그런 아빠의 늦둥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와도 어릴 적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 할머니와의 기억은 거의 유일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진공 상태의 캡슐에 담긴 것처럼 고요하지만 선명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있다.


아토피를 겪었던 어린 나는 자주 몸을 긁었는데, 다 자라지 못한 팔이 닿기에 내 등은 가장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 그래서 마룻바닥에 앉아있는 할머니 앞에 삐걱대며 누워 등을 긁어달라고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철없고 작은 손녀의 등을 손으로 삭-삭- 긁어주셨다. 할머니의 손은 주름과 굳은살로 적당히 거칠었으며, 힘이 없었다. 따라서 나의 등을 오르락내리락하기만 해도 여린 피부의 간지럼을 해결해줄 수 있는 맞춤 효자손(孝子-)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는 손녀에게 딱 맞는 효자손을 갖고 계셨다. 그 당시 나는 효자가 될 생각은커녕, 할머니를 통해 나의 간지러움을 해결하는 데 재미를 느꼈었다.


하지만 내 팔이 등에 닿기도 전에 할머니는 효자손 역할을 그만두셔야 했다.

어느 날처럼 학교를 마치고 씩씩하게 집에서 혼자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해가 다 졌는데도 와야 할 식구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학습된 씩씩함을 실천하는 데에 조금씩 지루해질 때쯤이었다. 

불길한 소식을 전하는 영화의 고전적인 문법처럼 고요함을 깨는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았는데, 열 살 터울의 언니가 울먹거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언니는 울음을 꾹꾹 참아가며 말을 했는데, 자꾸만 삑사리가 나서 나를 웃게 만드는 것이었다. 철없는 미취학 아동이던 나는 통화 내용을 귀 기울여 듣지도 못하고, 울음을 참는 수화기 너머로 웃음을 참아야 했다.

전화를 끊고 다시 홀로 남은 집안에 고요함을 듣고 있자니 웃음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들은 말은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집 옆에 있는 병원으로 오라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씩씩한 나라지만, 아직 어린이집을 다니는 나에게 혼자 어두운 저녁에 길을 나서게 하다니. 조금 서운한 마음이 삐쭉삐쭉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난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시시콜콜한 웃음과 투정을 내뱉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잘 와 닿지 않았다. 그저 방금 전화 속 언니의 울음소리가 나를 킬킬거리게 할 뿐이었다.


병원 앞에서 언니가 훌쩍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 속 울음소리가 생각나 웃음이 날 뻔했지만, 손을 잡고 병원에 들어가자 차갑고 엄숙한 공기가 나의 입꼬리를 무겁게 내렸다. 

언니 손에 이끌려 병원의 흰 벽을 훑으며 가던 내가 처음 고개를 들어 올린 이유는 할머니 병실 앞에서 아빠가 울음을 터트리시며 "주연아"하고 이름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아빠의 눈물이, 흔들리는 울음 속에서 불리는 나의 이름이 너무 낯설어 눈물이 났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아빠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눈물이 먼저 알아차렸다. 아빠가 당신의 엄마를 잃었고, 나는 아빠의 울음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난 아빠의 눈물을 본 적이 없다. 그 날 그 병원에서 나의 이름을 부를 때, 아빠는 마지막으로 어린 아이 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할머니의 죽음이 나에겐 가장 철없던 순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항상 마음을 쓰리게 한다. 힘없고 주름진 손의 할머니를 귀찮게 한 죄, 이별의 순간에도 철이 없어 웃음을 터트린 죄가 날카로움이 되어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할머니를 보내기 전에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이별이 어떤 것인지 알았더라면. 7살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을 가지고 병원을 찾아가 낯선 아빠의 울음이 아니라, 할머니의 부재에 눈물을 흘렸을 텐데. 아니, 이별하기 전에 손녀의 귀찮은 요구를 늘 받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렸을 텐데. 

이별이 이별인지 몰랐던 나는 이렇게 후회로 가득한 기억을 안고 산다. 


이러한 고백이 그때의 어리석음을 속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한 사람이 주어로 올 때, '용서'라는 단어 뒤에는 주로 '구하다', '바라다' 등의 동사가 따라온다. 모두 용서를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상정하는 단어들이다. 죄는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으니, 속죄해줄 수 있는 신도 없다. 

그저 원하는 것은 못다 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서야 슬픔보다는 서로의 안녕을 빌어줄 수 있는 진정한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의 막내아들은 딸 앞에서 더 이상 울지 않는 든든한 나의 아빠가 되었다고, 그리고 손녀는 무럭무럭 자라 스스로 등을 긁을 수 있게 됐고, 아토피도 거의 다 나았다고. 철없던 과거에 대해서는 용서받지 못할 기억을 갖고 사는 벌을 받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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