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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주연 Jan 04. 2019

후회라는 기시감

youth, 2015

Fred: Lena? 
Lena: yes? 
Fred: stop crying, please.


은퇴한 지휘자 '프레드'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그의 대표곡 'simple song'을 연주해 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개인적 이유라는 답변만 반복하며 줄곧 거절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요청에 프레드는 그 이유를 밝히게 된다. 

'simple song'은 아내를 위해 작곡한 곡이며, 오직 그녀만이 연주하고 부를 수 있는 곡이라고. 

그러나 지금 그녀는 병에 걸려 노래를 부를 수 없기에 'simple song'은 앞으로 절대 연주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대화를 들은 '레나'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숨죽여 흐느낀다. 

레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표현에 인색한 아버지가 그의 삶의 방식인 음악으로 어머니를 여전히 사랑하고, 추억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레나는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게 뒤돌아 눈물을 흘린다. 

이내 아버지가 자신을 부르자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울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여왕의 특사와 이야기하던 아버지는 딸의 울음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그는 알고 있던 것이다. 

딸이 아버지를 오해하고 자신에게 울면서 화를 냈을 때도 담담히 듣고 있던 그였다. 

그는 딸이 아버지를 오해하고 미워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을 더욱 참기 힘들어했다.


아버지는 딸의 슬픔을 감각이 아닌, 감정을 통해 알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레나에게 울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프레드를 보면서 내가 부모님 모르게 울었을 때도 그들은 다 알고 계셨을까 생각이 들어 부끄러움과 슬픔이 목에서 엉기었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던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었다. 

부모님께 자주 전화하지 않는 나는 그날도 늘 그렇듯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모두가 숨죽인 열람실에서 벗어나 매점으로 갔다. 

묵언을 수행하던 입에 음식을 밀어 넣고 떠들썩함을 뱉어내는 공간이라면 내 사적인 통화도 자연스럽게 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통화 내용은 늘 뭐하는지, 밥은 먹었는지, 별 일 없는지 등 진부한 질문들이었고, 그에 대한 대답 역시 특이사항 없는 진부함으로 보답해야 하는 대화였다. 

그렇게 단조로운 대화를 끝냈는데, 그날따라 엄마는 내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그리고 마치 오늘 먹은 저녁 메뉴를 말하듯 태연하게, 그리고 태연하려 애쓰며 아빠가 입원했다가 오늘 퇴원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연기는 꽤나 그럴싸해서 난 그때까지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왜 입원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지난주에 아빠가 쓰러졌었다고 했다. 

개연성 없는 전개에 당황했고, 또 이런 전개에 태연한 연기를 하고 있는 엄마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아빠는 매일 아침 조깅을 하고, 담배는 커녕 술도 잘하지 않으시는 건강한 분이셨다. 

그런 아빠가 갑자기 쓰러지다니. 그리고 그게 벌써 지난주 일이라니. 

그 어떤 복선도, 예고편도 없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한껏 놀란 내 얼굴을 철저히 감추기 위해 사물함 뒤로 숨어 들어갔다.

너무 놀라 "어?"라는 외마디를 던진 나에게 엄마는 아빠가 쓰러지던 날의 얘기를 어색하게 꺼냈다. 

그마저도 어제 본 드라마 속 내용을 말해주듯 덤덤했다. 


집에 있던 아빠가 갑자기 쓰러졌고, 집에 있던 엄마가 119에 신고할 정신도 없이 아빠를 부축해 차를 타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엄마는 자신이 집에 있어 다행이었다는 표현도 덧붙였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라고 했다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뻔한 대사였지만, 현실이 되자 묘한 미시감에 휩싸였다.

현실적으로 '조금'이라도 늦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상황이라도 준비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달래며 엄마는 이제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화가 났다. 

왜 이제야 말해서 내게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는 것이냐고, 아빠가 쓰러지셨던 것도 모르고 지나친 못된 딸이 되지 않았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이 어느 때보다 빠른 유속으로 떠밀려 나왔다. 

그 어떤 언어나 분노도 댐이 되어주지 못했다. 

전화로 전해진 그 소식이 야속하면서도, 우는 모습을 숨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리를 꾹꾹 눌러가며 호흡을 가다듬고 왜 이제야 말해주냐고 물었다. 

엄마처럼 태연한 연기를 하며, 가벼운 투정처럼 말이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이 너무나도 사소해 참고 있던 울음소리를 터트릴 뻔했다. 

"시험기간이니까. 괜히 걱정할까 봐"

시험이 야속했고, 내 시험공부를 방해할까 봐 놀란 마음을 혼자 삼켜냈을 엄마가 야속했다. 

그리고 입원 기간 동안 한 번도 전화하지 않아 그 사실을 전혀 모르던 내가 가장 야속했다. 

먼저 전화해서 진부한 질문들을 던졌더라면 내게는 슬퍼할 시간도, 엄마에게 힘이 되어 줄 시간도 충분했을 텐데. 


늘 뒤늦게 후회하는 딸과 아들들. 익숙한 이 전개는 나의 삶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가족 영화에서 늘 등장하던 이 클리셰는 언제나 날 울렸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복선이 되어주진 못했다. 

영화는 현실에 경종을 울려주지만, 현실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후회하는 사람으로 남는 법이다.


이후로 계속되는 나의 물음들에 엄마는 조금은 과장되고 어색한 연기를 계속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계속해서 덧붙이며 말이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한 번도 솔직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거짓이 진실의 아픔을 가려줄 것이라는, 그리고 각자의 연기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는 어설픈 믿음을 가진 채로.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그때 나의 울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우는 모습과 목소리를 수없이 봐 왔다. 

내가 아플 때 흘리던 눈물을 닦아주던 사람도, 내가 잘못했을 땐 내 눈물, 콧물을 쏙 빼놓던 사람도 늘 엄마였으니까. 

따라서 휴대폰 너머의 눈물은 소리 없이도 엄마의 마음을 적실 수 있었다. 

진부한 대답을 늘어놓을 때와는 다른 어색한 공기의 흐름,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엄마에겐 너무 쉬운 '틀린 그림 찾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더욱 태연하려 애썼다.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동반되어야 효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빠가 퇴원하신 후 전화를 거신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엄마는 영화 속 '프레디'처럼 딸이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라셨다. 

아빠의 아픔을 뒤늦게 알아챈 나보다는 별 거 아닌 일이 지난 후의 나라면 그렇게 미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엄마와 나는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늘 솔직하지 못했다. 

좋은 관계는 좋은 말만 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도 솔직하지 못한만큼, 슬픔에 있어서도 그랬다. 

엄마가 알고 있는 가장 진부하고 무던한 나의 모습들을 보여주려 애쓴다.

변함없다는 건 안정적인 것이고, 안정적인 것은 평화롭다는 것이다. 

엄마의 평화는 인생의 또 다른 굴곡을 넘어가는 두려움을 가리고 있으며, 나의 평화는 홀로 서기의 위태로움을 가린 채 우두커니 서있다.

평화의 동상을 세우는 일은 그것을 바라는 마음과 함께 그 커다란 그림자로 보이고 싶지 않은 모든 것들을 가리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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