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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주연 Jul 01. 2019

사랑이지만 자랑은 아닌

Lady Bird, 2018

Lady Bird: I just, I wish that you liked me. 
Marion: Of course I love you. 
Lady Bird: But do you like me? 
Marion: I want you to be the very best version of yourself that you can be. 
Lady Bird: What if this is the best version?



"잘했어?"

"그냥"


나는 큰 일을 큰 일없이 치르고 나면 잘했냐고 묻는 엄마에게 '그냥'이라고 답하곤 한다.

그건 엄마에게 기대도, 부담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기대를 낮추려는 방지턱이자, 혹시나 실망하게 됐을 때 너무 마음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방어벽이다.


수능이 끝났을 때도 엄마는 만나자마자 쏟아내고 싶었을 질문을 차에 올라탈 때까지 참다가 시동을 걸며 "어땐?"하고 물었었다.

난 늘 그랬듯 "그냥 괜찮았어"라고 답했다.

엄마는 "네가 '그냥'이라고 답하면 잘 본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의 '그냥'은 희소식이라는 공식이 통했었다.

그러나 졸업 후 만난 사회는 비대했고, 내 노력은 성글었으니 이따금씩 걸리던 운들도 송송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내 인생의 운수 좋은 날들은 끝이 났다.



내가 점점 '탈락'이라는 단어를 자주 만나게 될 때쯤, 가족과 조금씩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합격 확률이 낮은 게임에서는 응원조차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의도적으로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는 날이 늘어갔다.

엄마에게는 일상적인 안부 전화였겠지만, 전화를 받을 때마다 빈 손으로 집들이에 초대된 기분이었다. 

그 빈 손이 부끄러워 초대에 응하지 않고, 먼저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는 딸이 되어 버렸다.


예전엔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잠깐 일이 있어 받지 못했을 거란 믿음이 있었는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걸었었다.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답하지 않았고, 부재중 전화 알림도 외면했다.

그렇게 엄마는 단 한 번의 연결되지 않은 전화만으로 단념하게 됐다.

카톡을 배우고 나서부터는 종종 부재중 알림과 함께 메시지가 오기도 했다.

어떤 날은 "전화 좀 해라"라고 투덜대기도 했고, 다른 날은 "울 작은딸 목소리 듣고 싶어요~♡"라고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전화를 받지 않은 주제에 눈물이 핑 돌곤 했다.


어쩌다 전화를 받으면, 엄마는 "웬 일로 바로 받네!"하고 반가운 투정을 부렸다.

"왜 전화 안 받으맨?"하고 물으면 나는 "그냥"하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사춘기에나 할 법한 대답이 스스로도 민망했기 때문에 모기 소리같이 작고 거슬리게 말했다.

희소식을 가져와주던 '그냥'은 슬픈 소식을 삼키는 '그냥'이 되었다.


며칠 전, 엄마에게 탈락 소식을 전해야 하는 날이 또 한 번 왔었다.

'탈락의 날'이 늘 그렇지만, 그날은 유난히도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엄마는 소식을 듣자마자 티 내지 말아야 하기에 더욱 티가 나는 무음의 탄식을 내뱉었다.

본인이 가장 크게 낙심하고서, 곧바로 마음 아파하지 말라며 나를 위로했다. 

더 열심히 한 애들이 있었을 거라 해놓고서, 버럭 너 같은 애를 왜 떨어뜨리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들쑥날쑥한 감정 사이를 오가는 엄마의 반응은 내 마음을 단단히 묶어놓던 고무줄을 질근질근 끊어댔기에 지하철에서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꿉꿉하고 창백한 지하철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그다지 감동적인 그림은 아닌 것 같아 괜히 듣고 있던 노래를 '짐살라빔'으로 바꿔 들었다.

혼을 빼놓는 주술 같은 그 노래가 눈물 흘릴 정신을 혼돈 속으로 앗아가 줄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효과는 좋았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리듬도 속상함이 묻어난 엄마의 목소리는 잊게 할 수는 없었다.


영화 '레이디 버드'에서 딸 '레이디 버드'는 엄마에게 "나 좋아해?"하고 묻는다. 

엄마가 딸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빼고서, 좋아하냐고.

엄마는 당황하지만 이내 딸이 언제나 최고의 모습이길 바란다며 적당히 둘러댄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다시 묻는다.


"이게 최고의 모습이라면?"


늘 엄마의 사랑이자 자랑이던 딸이 자랑일 수 없을 때. 엄마는 어떤 마음일까?

난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오늘도 전화가 울리는 화면을 가만히 쳐다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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