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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순례 Sep 18. 2023

외로우면 대패질하라 ⑤시간은 인간을 성장시킨다.

사람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8가지 성장  프로그램(연재)


5. 시간은 인간을 성장시킨다.

  나는 삶이 둘로 갈리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P는 마땅히 일어날 일이 일어났으니 초조해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더 큰 사건일수록 더 큰 성장통이 될걸.” 더 큰 사건이라니? 겁이 덜컹 났다. P는 예지의 능력이 있어 보였다. P는 그것은 예지의 능력이 아니라, 경험에 근거해서 마음의 지도를 읽었을 뿐이라고 했다. “시간의 목적은 인간 성장에 있다. 그것뿐이다.” 그러면 P가 말하는 정체성은 나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내적 정체성을 말하는 걸까? 


  딸은 바이올린 전공으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명문대 음대에 입학했다. 딸보다도 내가 더 좋아했다. 나는 지방대를 나왔다. 자신 있게 딸의 대학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딸이 엄마에게 주는 최고의 기쁨이었다. 딸도 기뻐했다. 내가 딸로 보상받은 기쁨은 단지 몇 개월. 나중에야 알았지만, 딸은 대학합격보다도 엄마와 떨어져 서울에서 자취할 수 있어서 더 기뻤다는 것이다.


  딸의 대학 생활이 수상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몇 학기나 휴학했다. 물리적 거리로 통제할 수도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는 위대한 연주자가 되기 위한 연습은 중단하고,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뭘 물으면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다 알아서 해. 걱정하지 마.” 딸의 아르바이트는 결혼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에 팀을 조직해 연주하러 가는 것이다. 예술적이지 않은 장소에서 힘 있고 달콤하게만 연주하려니 바이올린 활이 다 휜다. 손목 놀림도 거기에 맞춰져 정교한 음악성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 대학에 입학하려는 입시생 개인 지도도 한다. 벌이는 짭짤했다. 그런데 그 돈은 어디다 다 쓰는 것일까? 부모에게 용돈은 용돈대로 받아 쓰면서.      


  딸은 몇 학기를 휴학하더니 나와 남편 앞에서 작심 발언을 했다. 

  “나, 자퇴해야겠어. 바이올린은 아니야. 바이올린이 아니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줄 알았어. 그게 아니었어. 결단은 빠를수록 좋아. 나, 요리사가 되고 싶어. 취업도 요리사가 잘돼. 바이올린 해서 뭐 하려고. 엄마처럼 임용고시 봐서 음악 교사가 될 의지도 자신도 없어. 요리도 창조야. 식객의 입맛을 읽어주거든.”

  나는 울화가 치밀어 딸의 말을 끊었다.


  “너, 무슨 말을. 오스트리아에 있는 엄마 친구에게 유학길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그까짓 요리사. 그동안에 들인 공과 돈, 너 상상이나 할 수 있니?”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딸은 말을 이었다. 

  “그까짓 요리사라니. 나 그동안 번 돈으로 요리 학원 다녔어. 처음에는 취미로 했으나, 할수록 요리의 매력을 느꼈어. 요리야말로 예술이고 창조던데. 엄마는 좋은 연주로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는 음악가가 되라고 했지. 그 길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기껏 학원 강사야. 요즘은 출산 저하로 레슨 학생도 적어. 유럽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정규직이 없어 학습지 교사처럼 학생들 개인 지도나 하러 다니는 동문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아니면 다른 일을 하던가. 아무튼 내 적성이 아니야. 난 고상하게 살 사람이 아니야. 엄마나 고상하게 살아. 실은 고상한 것 하나도 없으면서. 나는 내 인생을 살 거야. 엄마는 엄마 인생을 살아.”

  “요리사? 너무 낭만으로 생각하지 마. 온종일 주방에서 땀 흘리며, 음식 냄새 맡으며 식자재를 썰어야 해. 그거 중노동이야.”

  “그럼,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는 바이올린은 중노동 아닌가? 봐, 내 왼쪽 뺨 뒤틀린 거. 요리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줘. 음악은 안 들어도 살지만, 밥은 먹어야 하거든.”

  “너, 너의 타고난 음악성을 다 사장하는구나.”

  “타고난 음악성? 그 말, 나도 엄마 말만 믿고 믿었지. 내가 명문 음대 가서 배운 것은 나에게 그런 재능이 없다는 위대한 교훈 하나였어. 바이올린은 취미로도 충분해.”


  나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남편은 나를 진정시키며 딸에게 말했다.

  “너의 뜻은 존중한다. 그런데 나중에 마음이 변할 수 있으니, 자퇴는 말고 우선 휴학하면 어떨까?”

  “휴학? 그래야 가능한 휴학이 한 학기 남았는걸. 나도 곧 나이 30이야. 서투른 결정 아니야.”


  남편이 딸의 말을 경청하고는 한 말이다. “그동안 네가 마음고생 많았구나. 나도 너의 뜻을 존중한다. 이제부터는 너의 행복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 딸이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면, 마음고생을 시킨 사람은 바로 나라는 거다. ‘이제부터’는 그동안은 딸이 엄마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항상 나에게 맞추며 가족의 위장 평화를 지켜준 남편이 딸을 통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다. 그날 남편의 싸늘한 시선은 그것을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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