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8가지 성장 프로그램(연재)⑥
그날 이후 밥알이 모래알이었다. 한 달 만에 체중이 5㎏ 빠졌다. 보는 사람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삶의 포물선은 수시로 밑으로 내려간다. 시간을 기다리면 내가 나서지 않아도 포물선은 다시 위로 올라간다. 나는 그 리듬을 자연스럽게 타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대안을 찾아 경조증 환자처럼 기분을 상승시켜 견뎌왔다. 이번에는 가라앉은 마음을 상승시킬 대안이 없다. 내 결핍을 보상해 주던 가족 로맨스는 다 깨졌다.
아동기의 외로움이 되풀이되던 어느 날, 나도 크게 일탈할 기회가 왔다.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팔베개하고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입시 준비로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이해하려 했다. 옆자리 학생을 시켜 깨우기만 했을 것이다. 그날 분에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그 학생이 마치 잠꼬대처럼 말했다. “잘난 척하지 마세요.” 그러자 학생들이 모두 웃었다. 여기저기서 “잘난 척”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첫째에게도 둘째에게도 남편에게도 나는 항상 잘난 척했다. 말하자면 우월한 위치에서 아랫사람에게 지시하고 명령하고, 내 말이 항상 옳은 것처럼 밀어붙이는 식이었다. 딸에게는 “너 그렇게 해야 해. 너를 위해서.” 남편에게는 “당신 그렇게 해야 해. 가족을 위해서.” 학생들에게는 “이게 참 교육이란다.” 이런 식이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상대에게 주입했다. 왜 나는 상대의 옳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내 독선과 고집과 일방적 판단을 인정하지 못했을까. 다 내 허한 마음을 달래려고 상대를 사용한 헛짓이었다.
예술혼을 찾으려는 나의 미술관, 딸로 내 어린 시절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던 욕망, 이상적 교육관, 언제까지 내 편이 돼줄지 알았던 남편,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떠났다. 내가 돌아갈 곳은 급성 우울증이었다.
그때 P가 한 말이다. “큰 고통은 큰 성장통!” P는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줄 알았나. P는 마음의 지도를 보고 읽은 것뿐이라고 했다. 마음의 지도는 각자의 몫에 따른 ‘자기 성장’으로 안내한다고. 그럼, 지금 나의 절망은 일어나면 안 될 일이 아니라 ‘자기 성장’을 위한 지도의 이정표인가. p가 말했다. “희로애락은 피할 수 없다. 희로애락에 대한 마음가짐만 중요하다.”
나는 솔로몬의 잠언이 떠올랐다. 고대 예루살렘 도시에서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그가 말년에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이 ‘헛되다’였다. 그는 해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떤 새로운 일이라도 이전에 이미 있던 헛된 것이라 했다. 솔로몬은 온갖 부귀와 쾌락을 누리다가 깊은 우울의 늪을 헤매다 그것의 헛됨을 깨닫고 ‘헛됨의 지혜’를 발견했다. 그가 확신하는 지혜는 자기 본분에 만족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다. 자기 본분에 만족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지혜라고, 나는 그 반대였었다.
현실을 즐겁게! 내가 추구한 이상도 이루어지는 순간 이미 오래전에 있었던 것으로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 나는 지금까지 헛된 것을 쫓아 미래를 어슬렁거렸단 말인가. 그것이 최고의 삶인 것처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조소하면서. 솔로몬의 지혜로 비추어보면 나는 어리석음의 극치에 있는 사람이다. 희망이라는 내일의 속임수에 속아 오늘을 낭비하고 있었고, 그것을 가족과 학생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나는 일탈을 결심했다. 정년 은퇴가 신조인 나에게 조기 은퇴는 큰 일탈이다. 가족 모두가 일탈했다. 나도 일탈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다. 무너진 마음을 재건하지 않고 일을 계속하면 마음은 회복 불능의 상태로 될 것이다. 아직 재건의 씨앗이 남았을 때 그 씨앗을 키워야 한다. 그동안 너무 질주해 심신에 쉼이 필요하다.
나는 달리기를 중단하고 멈추기로 했다. 그래도 내 결정에 긴가민가하자 P가 말했다. “변화의 속도가 필요할 때, 사람의 무의식은 외적 환경을 조정하기도 해.” 내가 조기 퇴직하게 만드는 힘은 자아의 의지가 아니라, 내 인생 로드맵이 그려져 있는 무의식이었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