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8가지 성장 프로그램, 연재⑦
퇴임 후 나의 가장 큰 변화는 집에서 15분 거리의 호수를 거의 매일 찾아가 걷는 것이다. 나야말로 운동은 숨쉬기 운동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체질적으로 걷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했다. 걸으면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생각의 조각들이 의식 위로 올라온다. 그것은 분수처럼 산만하고 아지랑이처럼 부드럽다. 다양한 구슬 모양이기도 하다. 그래도 계속 걷는다. 몸이 지칠 즈음에 복잡한 생각들은 단순해진다. 생각의 조각들이 꿰어 목걸이의 형태를 갖춘다. 마음은 단순하고 고요해진다. 이것이 바로 ‘텅 빈 충만’이었다.
후배 중에 아마추어 마라토너가 있다. 그는 마라톤도 중독이라 했다. 한참 뛰면 무념무상이 되고, 내가 뛰는 것이 아니라 뛰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이때 쾌감은 성적 오르가슴 그 이상이고 지속성이 있다고 했다. 그때는 후배의 말을 무시했으나,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에게 걷기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였다.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집, 내 욕망도 다 털린 빈집, 정작 비워야 할 것은 내 초라한 욕망이었다.
그해 가을이었다. 나는 호수 벤치에 무심하게 앉아 있었다. 돌멩이 하나를 주워 호수에 던졌다. 무심하게 나를 바라보며 입만 뻥긋대던 잉어가 물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곱게 물든 단풍나무 가지에 앉은 참새도 뿌드득 날아갔다. 호수 산책로에는 백일홍이 다양한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잠자리 떼들이 한가하게 그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가을 햇살은 부드러웠다.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순간, 나도 그 조화의 일부로 흡수되는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시간 나와 자연이 하나 된 느낌은 내 오래된 긴장을 다 풀어놓았다. 긴장이 풀어지자 나는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짧은 잠 중에 꾼 꿈이다.
“호수에 핀 연꽃이 참 아름다웠다. 꽃잎의 빛은 신비로웠다. 흐르지 않는 탁한 물에서 저렇게 아름다운 꽃이 피다니! 그러자 그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연꽃 하나가 내 앞으로 클로즈업됐다. 뿌리에는 탁한 진흙이 묻어 있었고 소리가 들렸다. ‘꽃인가 진흙인가?’ 나는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다.”
꿈인지 생시인지 너무 생생했다. 나는 꿈속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름다운 연꽃은 진흙을 먹고 폈으니 진흙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연꽃은 진흙을 먹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뿌리에 탁한 진흙이 묻은 채로 내 앞으로 클로즈업된 연꽃을 한동안 떠올렸다. 그 연꽃을 연상할 때마다 마음이 맑아졌고, 새로운 에너지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 진흙! 연꽃을 그리워한 나는 연꽃을 피우는 진흙은 버리려 했다. 그래서 내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진흙을 용납할 수 없고, 진흙이 두려워서.
큰딸은 엄마가 변하면 우리 집이 평화롭다고 했고, 작은딸은 엄마가 주제 파악을 해야 가족이 편할 것이라고 했다. 나의 학생들은 나를 잘난 척하는 선생으로 봤다. 남편은 더는 나에게 맞추며 살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동안 내가 무시한 진흙이 꿈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진흙은 어둡고 습한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양질의 세균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 세균이 연꽃을 피운다. 늦었다고 지난 세월을 아쉬워하는 나에게 P가 말했다. “지금이 바로 너의 연꽃을 피우는 적기야.” 그동안 진흙이라 하여 외면한 것을 받아들이고, 삶의 에너지로 삼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