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심리치료가 필요하다며 아버님을 모시고 왔다. 당시 그녀의 아버님은 60대 중반이셨다. 아버님은 같은 말을 매일 반복하셨다. “어제 지하에 있는 무도회에 갔었다. 감미롭지만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모두가 쌍쌍이 춤을 추고 있었다. 내 커플은 다른 어느 커플보다도 유연한 춤을 췄고, 모두들 우리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딸이 볼 때에 아버지는 영락없이 미치셨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오래되어 말동무가 없어서 아버님이 저러신 줄 알았고, 그동안 억압하고 못다 한 말이라도 실컷 하시라고 나에게 모시고 온 것이다. 그 분은 일주일에 두 번, 오실 때마다 활짝 핀 표정으로 위의 말을 되풀이 하셨다. 정신분열증상 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증상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 분은 가장 행복해 보였으나, 그 상태로는 동네 경로당에 가도 다른 노인들과 어울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분은 정말 미친 걸까? 상담 회기가 길어지면서, 그 분의 환상은 사실은 아닐지라도 어떤 진실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환상 속에 존재하는 그 분의 커플은 관계가 아주 좋았던 시절의 그의 아내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즉 신성을 가진 그 분 안에 있는 여성성이다. 감미롭지만 신나는 음악은 수도자적인 기질을 가진 그 분이 오랫동안 동경해 왔으나, 삶에 찌들어 귀 기울이지 못한 내면의 소리를 말해 주고 있었다. 춤을 추는 것은 참된 자기를 구현하고 나서의 기쁨을 표현한다. 많은 사람 중에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한 인간이 신성과 연결되었을 때에 느끼는 오르가슴과 같은 것이다. 무도회장이 꼭 지하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일이 무의식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신병의 진실에 대하여
그의 자아는 무의식에 동화되어 이 일을 마치 실제의 일로 경험하고 기분을 상승시켰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곳은 천국이다. 딸의 말에 의하면 아버님은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배운 바는 없지만, 누구보다도 자기 삶에 충실하셨다고 한다. 육십의 나이에 아내를 잃고, 건강이 상하고, 특별한 애착을 가졌던 작은 딸마저 혼기가 다가오자 약해지기 시작했다. 혼자 남을 것이 두려워지자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는 다르게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기에 이르렀다. 딸도 아버지의 이런 모습이 의외였다. 그러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밝아지고 오히려 걱정하는 딸을 위로했다. 위 환상 때문이었다.
그 분은 정신병에 걸린 것이 맞다. 그러나 심층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의 깊은 무의식이 좌절하고 비관하는 그의 의식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아니야, 당신은 충분히 잘 살아왔어. 지금은 삶을 마무리하는 당신을 위한 무도회에 참석할 시간이야.”
동화나 민담의 해피엔딩에서 댄스파티는 흔하다. 쌍쌍 춤은 이상적인 자기실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수고를 위로한다. 인류의 집단무의식은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을 댄스파티에 투사했다. 적어도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순간만은 춤이 곧 나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은 잊는다. 그 분의 무의식은 긴 세월 잘 살아왔다고 그 분의 수고를 동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정신은 심리학을 넘어선 곳에 있다
만일 그 분이 정신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런 무의식의 소리를 듣고도, 그 소리에 함몰당하지 않고 다시 의식의 수준으로 돌아와 남은 일을 할 것이다. 그의 자아는 현실로 다시 올라오는 일을 포기했다. 아예 무의식이 세계로 동화되기를 원했다.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애석한 일이지만, 그 분의 입장에서는 좀 더 깊은 안식의 길로 들어갔다고 할까?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분열과 억압 그리고 회피의 방어기제를 사용한 정신분열증상인 것은 맞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세계는 심리학과 정신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더 넓고 깊다. 무의식은 그분의 남은 생에게 안식을 선물로 주고 있다고 하면 가족들에게 너무 잔인한 해석일까? 그 분은 치매증상이 와서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무도회의 환상도 더 이상 즐기지 못했다.
이처럼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위해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뒷감당은 가족의 손으로 돌아간다. 이런 일들은 효라는 윤리적 규범으로 지구의 역사 이래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슬퍼하거나 원망만 할 일이 아니다. 가족에게 주는 인생의 텍스트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텍스트 중에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없다. 감당할 만하니까, 감당해야 하니까, 그래야 더 많은 성장을 하여 더 큰 무도회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춤을 추면서 살아라
이 분의 가족들은 아버지의 무도회 환상을 정신병적 증상이라고 무시할 일이 아니다. 삶은 늘 힘들지만, 그래도 춤을 추듯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유언이다. 인생은 각자의 무대에서 각자의 춤을 추는 것이니 삶을 사랑하라는 유언이다. 의식적 수준의 유언보다는 무의식적 수준의 유언이야말로 평생 붙들고 가고, 자손들에게 물려도 줄 수 있는 귀한 교훈이 아니겠는가?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 때로는 사실은 아니어도 삶의 깊은 진실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을 관찰했다. 융은 그들의 실언을 실언이 아닌 진실로 받아들여 대화함으로 그들의 정신병적증상의 원인을 알아냈고 병세도 호전시킨 사례가 있다. 세상에는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참 많다. 삶이 깊어질 즈음에는 보다 무의식적이 되어야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