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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꽃 천지

비에이/후라노와 라벤더

by 본격감성허세남

우리 날씨 요정 유수인과 함께한 여행에서는 한 번도 날씨가 별로였던 적이 없다. 이날도 완벽한 날씨였다. 구름조차 거의 없는 맑은 날씨, 일 최고기온 24도 정도라 크게 덥지도 않고 쾌적, 습도도 낮고, 미세먼지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이상적인 봄 날씨였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가장 기대했던 날이고, 예보를 계속 봤는데 흐리고 비가 온다고 해서 걱정했었는데 기우였다. 역시 날씨 요정!


여름 하면 라벤더, 라벤더 하면 홋카이도. 오로지 라벤더 꽃 하나를 보겠다고 홋카이도에 온 것이라고 할 정도로 꽃은 이번 여행의 핵심이었다. 숙소로 잡은 오타루에서 라벤더 꽃밭이 있는 비에이/후라노까지 편도 2시간 40분가량이 걸리는 먼 거리지만 중요치 않았다. 하루 동안 운전 많이 하고 피곤할 각오로 과감하게 나섰고, 굉장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제일 유명한 '팜 토미타'. 주차장에 차를 대면서 살짝 보이는 라벤더 밭의 보라색이 오랜만에 마음을 두근두근 거리게 했다.


보라색 라벤더와 파란 하늘의 조화


라벤더는 보기에도 좋지만 향도 좋다. 주변을 걸어 다니는 내내 은은한 향 덕분에 발걸음이 가볍다. 역시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이다. 그런 아빠 엄마를 닮았는지 도시에 비해 교외로 오면 급격하게 에너지가 올라가는 우리 딸. 수인이도 덩달아 신이 나서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며 꽃을 즐겼다. "라벤더꽃" 하면서 금방 이름을 배우더니 제법 능숙하게 향기도 맡았다. 하긴 아파트 단지에서도 꽃만 보면 만지느라 바쁜데 이렇게 여러 가지 꽃이 많은 곳에 왔으니 얼마나 흥분될까. 함께 온 다른 어른들도 이렇게 신나는데.


함께 모시고 간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즐거워하셔서 다행이었다. 중간에 우리가 수인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없어지셔서 급하게 로밍을 켜서 전화를 하는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덕분에 하나씩 드셔 보시라고 사온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우리가 다 먹어버렸다는 사실. 아이스크림이 중요하랴. 이렇게 쾌적하고 평화로운 곳에서는 모든 것이 용서된다. 아름다운 날씨 덕분에 더욱 아름다웠던 라벤더 농장.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함께 가족사진도 남길 수 있음에 감사드렸다. 기회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 기회가 왔을 때 주저하지 말고 잡아야 한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느끼고 있다. 비록 종교는 없지만 내 감사를 어떤 신이든지 받아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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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 토미타에서의 즐거운 꽃놀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가족사진


라벤더 농장을 나와서 다음으로 향한 곳은 폭포와 호수. 차로 30분 정도 가면 나오는 곳이다. 중간에 잠시 쉴 겸 먼저 폭포를 찾아갔는데 별 기대하지 않았던 것과 다르게 규모도 꽤 크고, 시원한 폭포 소리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잠에서 아직 깨지 않아 차에서 내리기 전까지 내리지 않겠다고 떼를 쓰던 수인이도 폭포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어서 갑자기 다시 뛰어다녔다.


"폭포! 우와!"

"엄마 저기 봐요."


예전에 대만에 갔을 때부터 느낀 건데 수인이는 폭포를 특히나 좋아한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재미있나. 뒤편으로 무슨 관광안내소가 있고 거기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굉장히 많았는데 흥분한 수인이가 그 계단들까지 올라가려고 해서 말리느라 혼났다. 할아버지가 일단 중간까지만 데리고 올라갔다가 오셨는데, 임산부 엄마는 그런 많은 계단은 힘들단다 수인아.


폭포에서 차를 타고 5분 정도를 가면 '청의 호수'라고 하는 호수가 나온다. 호수 주변으로 자작나무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어 산책하기 좋고, 주변과 살짝 다른 물빛이 매력적인 곳. 수인이가 "아빠 안아줘요." 하면 우리는 어떻게든 달래려고 하는데 할아버지는 냉큼 안아주신다. 그래서 여행 내내 참 많이도 안겼던 수인이다. 호수를 둘러보고 다시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도 수인이가 안아달라고 해서 할아버지가 업어주셨는데, 뒤에서 보니 그 모습이 참 푸근하고 좋았다. 호수보다도 더 기억에 남는 사진이 바로 이런 사진이다. 수인이에게 계속 보여주면서 할아버지에게 더 잘 하라고 해야지. 가끔 할아버지 싫다고 도망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보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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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등에 업힌 손녀딸의 모습이 참 정겨운 사진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계채의 언덕'이라는 곳에 들렀다. 이 좋은 곳을 떠나기가 아쉬워 꽃을 한 번 더 보자는 마음으로 들린 곳인데 사람은 여전히 많았지만 그 광활함 덕분에 온 몸이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팜 토미타가 아기자기하고 예쁘다면 이곳은 시원시원한 매력이 돋보였달까. 트랙터 기차를 타고 돌아본 이곳은 곳곳이 참 아름다웠다. 완벽한 날씨가 한몫했음은 당연한 소리. 마치 윈도우 배경화면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곳에선 그냥 걷기만 해도 참 좋다. 기대했던 만큼 그 기대를 뛰어넘는 만족감을 주는 곳, 여름의 홋카이도는 참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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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흔한 들꽃으로 할머니가 꽃반지를 만들어 주셨다. 수인이는 그 꽃이 참 마음에 들었는지 웬일로 신나서 사진도 찍고,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자면서도 손을 꼭 모아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길에서 주운 돌멩이를 '돌멩이 친구'라면서 소중하게 여기고, 꽃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보면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우리 딸의 여성스러움을 보게 된다. 이게 여성스러움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여자 아이지만 인형도 좋아하지 않고 마냥 활발하게 뛰어다니기만 하는 우리 딸의 섬세함이랄까.


잠깐씩 떼를 쓰고 울고 그래도 이렇게 예쁜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난다. 그게 바로 아빠고 딸바보다. 치사랑은 내리사랑을 절대 이길 수 없다더니 딱 그 말이 맞다.


사진 2018. 7. 8. 오후 4 04 08.jpg "기분 좋아요 아빠!"


오타루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편도 약 2시간 40분가량이 걸렸다. 하루에 총 운전 시간만 6시간이 넘는 강행군이라 오타루에 거의 도착할 때쯤엔 오른발에 감각이 점점 없어질 정도였다. 아무래도 외국에서 더 긴장하며 운전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중간에 다들 자고 나 혼자 운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신기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그건 오늘 하루를 기쁘게 보냈을 때문이리라. 꽃도 예쁘고, 비에이/후라노 주변 풍경도 소박해서 참 마음에 들었다. 대부분 새로운 집들이 많아 보여서 오래된 맛은 없었지만 깔끔하고 고즈넉한 모습에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울에 살다 보면 이런 조용하고 깔끔한 곳이 끌릴 때가 많다.


이날 점심으로 먹었던 소바도 굉장히 맛있었다. 소바라는 음식이 원래 화려하지는 않다. 메밀로 만든 면을 잘 삶아서 찍어먹는 것과 함께 내는 소박한 음식. 그런데 은근한 맛이 상당했다. 은은하면서 오묘한 맛이랄까. 함께 시킨 야채 튀김도 잘 어룰렸다. 아마 왕새우 튀김이라든지, 거대한 튀김이라면 어울리지 않았을 거다. 주변 분위기와 음식이 모두 잘 어울려서 참 편안했던 점심이었다. 약 30분의 기다림이 전혀 아쉽지 않을 정도로.

(https://goo.gl/maps/sPygd1y9BGm)


점심을 기다리며 수인이는 음식점 앞에 죽어있는 지렁이를 만지며 놀았다.


"지렁이가 움직이지 않아요."

"응, 죽어서 그래."

"죽은 지렁이!"


하며 툭툭 건드리면서 놀았다. 살아있으면 절대 못 만질 거면서. 말을 잘 하게 되니까 본인 의사도 더 확실해지면서 여행이 힘들어지긴 했지만 이전보다 재미는 더 생겼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사진을 볼 때마다 "라벤더꽃!" "폭포!" "우리 트랙터 탔지" 이러면서 말하는 걸 보면 기억도 더 잘 하는 것 같다. 덕분에 더 많이 보여주고 싶고 더 많이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곧 둘째가 태어나기에 아마도 해외여행은 당분간 이번이 마지막일 텐데... 그동안 많이 다니긴 했지만 괜히 새삼스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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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깔끔한 풍경, 그리고 그런 풍경에 어울렸던 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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