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건, 『GV 빌런 고태경』를 읽고
우선 책 잘 봤습니다
'GV 빌런 고태경이 다시 돌아왔다. 해외로 뜬 그가 다시 영화관으로 왔다. 그리고 막을 내리고 그 후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그 흔하디 흔한 클리셰를 쓰겠어?' 설마설마했던 우려가 다음 페이지에 현실로 드러나자 좌절했습니다.. 빌런으로 시작했으니 빌런으로 마무리를 짓는 수미상관은 좋다 이거야. 고태경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영화는 만드는 건지 그의 쓰이지 않은 공백기가 정말 궁금합니다.
이대로 책을 덮을 수 없다는 분한 마음에 소설 속 인물인 고태경으로 빙의해 봅니다.
"이 소설의 서사 방향이 빌런인 고태경을 조명한 건지, 주인공 혜나의 영화가 기다림 끝에 박수받는 과정에서 존버는 승리한다는 점을 의도한 건지 작가님의 의중이 먼가요? 빌런 고태경을 강조했다면 빌런으로서의 모습이 약했고 서두르게 마무리한 거 같은데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결같은 그의 GV 출석을 이해하려면 그의 사라진 시간을 되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극적인 마무리를 위해 일부러 빌런으로 남겨둔 건가요?"
내가 마저 그려본 고태경의 결말
우리는 살면서 여러 빌런과 마주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나와 신념이나 가치관이 맞지 않으면 빌런이죠. 안 그래도 빡세게 이 악물고 아득바득 노력하는 와중에 내 약점을 파고드는 사람들이 얄밉게 느껴집니다. 가뜩이나 갈 길도 바쁜데 이 사이에 낀 고춧가루를 보는 마냥 신경이 거슬립니다. 저자는 나와 다르면 악이라고 손쉽게 판단을 하지 말라는 듯 고태경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자 악이라 생각했던 그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냅니다. J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gv에 나타나 영화를 유심히 보면서 노트에 끊임없이 끄적입니다.
고태경이 끝내 영화를 찍었다는 결말은 없었지만 그는 지식의 저주에 빠져 앞으로도 감독 의자에 앉아 컷을 외치지 못할 거 같다고 상상해 봤습니다. 마블스에 나오는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처럼 그는 엔딩크레딧과 함께 영화를 사랑하는 영웅으로 자신이 기억되길 바라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영화계 유망주의 찬란한 앞길을 가로막는 타노스죠. 그가 먹는 단팥죽은 달지만 많은 사람들은 굳이 찾지 않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달콤한 게 쏟아지는 세상입니다. 증명 없는 신념은 공허하기에 어디를 가든 이해받지 못한 그는 극장을 계속 겉돌 거예요.
만들어낸 빌런
소원해진 관계에서도 일방적인 애정이 빌런을 키웁니다. 해외 영화제에 같이 가자고 했던 종현은 그녀가 사랑했던 과거의 모습과 달라졌습니다. 이전과 같이 사이좋게 재밌게 지낼 거라고 멋대로 착각합니다. 자신이 인정받는 스테이지에서 그는 가면을 벗고 빌런으로 등장합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빛나는 자리에 종현이를 들러리로 끼워 넣어 버린 오만의 엔딩입니다. 다크나이트의 배트맨처럼 빌런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집니다. 그녀가 만든 캐릭터로 종현을 보느라 흐리멍덩해져 그를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그린 남자가 아닌걸요.
애매모호한 사이에 '나도 좋으면 상대도 좋다'라는 어설픈 저울질을 한 대가입니다. 아쉬운 사람이 물러나 보지만 멋대로 부풀어진 한쪽에서 무거운 추를 빼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빛바랜 애정을 서로 이용한 관계는 쉽게 무너졌죠. 유튜브 조회수만 올리는데 혈안이던 윤미도 마찬가지입니다 혜나는 자극적인 영상을 올리는 떡밥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애정이 일방적일 때 야속하게도 '원찬스'는 더욱더 멀어집니다. 윤미와 승호가 영화를 보는 관점이 변한 건 청춘을 바친 영화계에서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주변의 인정을 제대로 받았다면 그들은 스크린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빌런은 누구일까?
이 소설에서 악을 뚜렷하게 상징하는 빌런은 누구일까요? 한교영 선생님부터 고태경까지 다들 영화에 진심입니다. 상업 영화든, 장르 영화든 각자가 애정 하는 만큼 책임지고 영화를 찍었습니다. 땀내나는 현장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왔던 이들이 아름다운 건 어설프게 영화를 대하지 않았기에 읽는 사람이 보기에는 악역이란 게 뭘까 의문이 듭니다.. 저렇게 열심히 했는데 누가 누굴 타락했다고 변절했다고 손가락질할까요?
인물들은 각자 사회에서 1인분 역할을 맡으려고 고군분투합니다. 유튜브에서 성공하든, 광고 매체로 가든 그들에게 영화란 피와 땀, 눈물이 찐하게 베여있는 애정이자 애증입니다. 꿈과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향한 헌정이 그들의 마음에 스틸컷으로 남겨져 있을 거예요. 선과 악의 구도에서 악이 약한 서사는 밋밋합니다. 현실로 돌아와 내가 틀렸다고 잘못 봤다고 NG를 외치는 빌런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필름이 닳도록 이불킥하게 하는 컷을 많이 찍길 기대해 봅니다. 주위에서 편집점이 많다고 욕먹더라도 빌런보다 시련을 극복하는 주인공이 역시 멋있으니깐요 :)
한줄평 : 상대방의 애정을 이용할 거면 땀 흘린 그들을 비난하지도, 모독하지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