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코스 마지막 셋째 날 아침, 잠시 핸드폰 사용을 허가받아 켰다. 며칠 연락 안 돼서 부모님이 걱정하실 터였다. 간단히 잘 있다고 메시지나 남기려 했는데.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게 화근이었다. 메이크어위시라는 단체를 통해 난치병 아이들 소원 들어주는 자원봉사 중인데, 이번에 새로 배정받은 아이가 하늘나라로 갑자기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아이 소원은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것. 우리 팀이 소원 들어주기도 전에 그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고양이 한 마리 가져보지 못한 채.
오후 명상, 유유자적 나타난 삼색 고양이 한 마리. 고양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마음이 아프다.
소원 이루지 못하고 떠난, 얼굴 모를 그 아이도 내 동생과 같은 소아암 환자였다. 초등학생 때,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내 동생 소원은 다마고치 게임기. 내 용돈으로 하나 사주었지만 게임해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고, 다시 명상에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게, 다 그 고양이 때문이다. 아니다, 꼬리게 꼬리를 무는 내 생각들 때문이다.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는다. 머리 짧게 깎은 중년의 태국인 여성이다.
"당신은 지금 생각이 너무 많군요. 명상을 하고 있지 않군요. 생각을 멈추세요.
명상을 잘못하면 오히려 위험해져요, 명상하는 법을 알고는 있나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더듬더듬 영어로 말을 건네주신다. 한국어로 생각 중이었는데 앗, 이 분은 어떻게 아셨지? 내가 명상하는 척, 사실은 감정의 늪에 빠져 있던 것을. 나름 숨도 천천히 고르게 잘 쉬고 있다 생각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그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제가 생각과 감정을 멈출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녀는 근처 다른 지역에서 요양소를 운영하고 있는 여승 아찰라 씨였다.
"숨을 깊게. 숨을 들이쉴 때는 "펑 러" 쉴 때는 "윱 러" 이렇게 따라 해 봐요. 들이쉬는 숨은 차갑고, 내뱉는 숨은 따뜻하게. 집중해서 호흡을 느끼 보세요. 눈은 거의 감는 것처럼 코끝을 바라보고. 배꼽 아래 아랫배가 볼록해졌다가 홀쭉해질 때까지 깊이 숨을 쉬어 보세요.
걸을 때는 천천히 스물다섯 걸음에서 서른 걸음 정도만 걷는 거예요. 더 많이 걸으면 안 됩니다. 오른발 걸을 때는 "콰양 러" 왼발은 "싸양 러" 속으로 생각하면서. 먼 곳을 바라보지 말고 3-4 걸음 더 앞선 지점을 쳐다보면서. 무작정 멀리 걷다 보면 마음이 흐트러지게 되니까, 중간에 꼭 멈추도록 하세요.
명상을 하다 보면 온갖 생각과 감정이 다 듭니다. 명상을 오래 했지만 나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내 마음이 다른 세상 어딘가를 떠돌 때, 그 순간 알아차리고 내 몸으로 다시 내 마음을 불러들여야 합니다."
펑 러, 윱 러가 들숨, 날숨인 걸까? 오히려 이런 낯선 언어로 호흡에 이름 붙이니 집중이 더 잘 된다. 아찰라 씨는 내일 명상에 대해서 더 잘 가르쳐줄 수 있는 분을 소개해줄 테니 아침 식사 마치고 접수대 쪽 홀로 오라고 했다.
숙소로 돌아가는데, 하얀 머리 이빨 여러 개 빠진 한 할아버지가 나를 붙잡는다.
"명상에 대해 그분께 좀 배우셨나요?
당신의 뇌, 당신의 사고, 그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명상을 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무엇이 오늘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습니까? 당신의 부서진 마음을 깨달았다면 그ㅍ다음에는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슬프게 만들었는지 그 모든 것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보아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의 끝까지. 더 깊이, 모든 슬픔의 원천까지. 그러고 나면 그 감정은 물러나게 될 겁니다.
세 가지를 기억하세요. 아니짱, 토깡, 아나따.
"아니짱"은 우리는 모두 태어나고 죽고 또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토깡"은 모든 것들은 다 변한다는 것이고, "아나따"는 우리 다른 형태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기억하세요. 그럼 한결 나아질 거예요."
2박 3일 코스 마치고 이 넓은 사찰에 4-50명 정도만 남았다. 그제야 내 정체가 탄로 났나 보다. 명상하는 법 제대로 모르고 하염없이 앉고 서고, 걷는 내가. 감정과 생각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내가.
묵언의 원칙을 깨고, 한 여승이 다가왔고, 또 다른 어르신도 말을 걸어주셨다. 내게 갑자기 스승님들이 생긴 기분이다.
아찰라 씨는 다음 날 아침, 다른 여승을 소개해 주셨다. 차근차근 낮은 목소리로 명상에 대해 알려주던 위파씨.
"핵심은 과거에 대해서도,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거예요. 호흡할 때 붓또, 이렇게 생각하면서 깊이 숨을 쉽니다.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기독교인이라면 예수, 무슬림이면 알라라고 해도 됩니다. 그렇게 당신의 마음을 육신에 붙들어 매는 겁니다.
걸을 때도 콰양러, 싸양러 이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25-30 걸음 걷는데, 멈춰서는 "싸, 톱" 이렇게 생각하면서 호흡을 단전까지, 발끝까지 내립니다. 들이쉴 때는 반대로 단전까지, 그리고 머리끝까지 올립니다.
호흡하다 보면 다른 생각이 들 거예요. 저도 그래요. 항상 다른 생각들이 납니다. 그럼 저도 저 자신에게 "위파, 여기로 돌아와 Please come back here"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자신의 모든 행동을 인지하면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차 키를 집는구나, 핸드폰을 만지고 있구나. 나의 행동 하나하나 인지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실수가 줄어들 거요.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될 거예요.
한국으로 돌아가도 지금 두고 온 문제들은 남아있을 거예요. 하지만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어요. 다만 아직 그 방법을 찾지 못한 것뿐이에요.
해결책은 다 자신의 관점에 달려있어요.
자, 제 발가락을 보세요. 제가 2살 때였나, 차 사고로 세 번째 발가락이 잘려나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보고 불쌍해 보인다, 흉측하다 할 수 있지만, 저는 다르게 봅니다. 양말 안에 발가락 사이에 공간이 있으니 시원하잖아요, 음식 떨어뜨려도 묻을 일이 없죠.
우리가 왜 태어났을까요. 저는 어렸을 때 저의 가족들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누군가의 자녀가 되기 위해, 누군가의 부모가 되기 위해 내가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라고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명상을 통해서 깨우침을 얻고, 태어나고 죽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거죠. 저는 제가 인간으로 태어나 이 삶을 사는 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 처음 만난 그녀에게 처음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돌아가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난 사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다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아직 찾지 못했을 뿐, 다 해결책들이 있다"라고 와파 씨는 위로해 주었다. 다 나의 관점에 달린 것이라고.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위파씨와의 짧은 시간이 끝나고, 다시 야외 법당으로 나갔다.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3박 4일 코스 오리엔테이션이 시작이다. 두 번째가 되니, 조금 익숙한 것들이 보인다. 앉은 방법, 걷는 방법, 여러 번 계속 반복되는 기도문의 음조.
그러다 갑자기, 옆에 있던 누군가 나를 부른다.
누군가 널 부르셔.
처음 보는 작은 체구의 여승께서 날 이끌고 앞으로 가신다. 어제 만난 할아버지가 옆에서 알려주신다. 지금 저기 앞에 계신 주지 스님이 영어를 조금 하시는데, 당신에게 명상에 대해 직접 알려주신다고 하네요.
스님은 높은 의자에 앉아계시고, 나를 데리고 간 여승은 무릎으로 기어 그분 앞에 도착한다. 어색하지만 나도 따라서 무릎 꿇고 기어 앞으로 나아간다. (남자 앞에서 이렇게 무릎꿇는 일은 처음이다!) 여승을 따라, 세 번 고두레 절을 하고 주지 스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