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수행을 실행하고 시작하는 사람들은 수행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경우가 많다. 수행은 그대가 번뇌에 맞서고 해묵은 습관들에 먹이를 주지 않으려 할 때 시작된다.
식용버섯을 딸 때는 아무 버섯이나 무턱대고 따지 하지 않는다. 무엇을 먹을 수 있는 버섯이고, 무엇은 독버섯인지 알아야 된다. 수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위험한 것들, 독사처럼 물어뜯는 번뇌들을 잘 알아야 그것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번뇌는 호랑이와 같다. 우리는 알아차림, 에너지, 끈기, 인내심으로 잘 지어진 튼튼한 우리에 호랑이를 가두어야 한다. 그 뒤 습관적인 욕망들에 먹이를 주지 않음으로써 굶어 죽게 할 수 있다. 굳이 칼을 휘두르며 죽이려 애쓸 필요가 없다.
번뇌는 고양이와도 같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면 계속해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먹이를 주지 마라. 그러면 결국은 오지 않을 것이다.
수행을 하다 보면 누구나 번뇌를 만나게 된다. 우리는 번뇌가 올라올 때 부딪혀 나가며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생각으로 어찌할 일이 아니라 직접 해야 하는 일이다. 많이 참고 인내 해야 한다. 생각하고 느끼는 습관적인 방식을 서서히 바꿔 나가야 한다.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할 때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는지 알아야 된다. 그러면 놓을 수 있다.
"아잔 차의 작은 오두막"
잭 콘필드, 폴 브라이터, pp. 70-71
아침 탁발식에 참여하고 모든 게 경이롭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는데, 오후 명상을 시작하니 갑자기 모든 원망이 떠오른다. 가족, 연인, 가까운 직장동료. 최근 상처받은 일이 하나하나 다 생생히 기억난다.
무엇인가 쎄한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내 마음을 멈추었어야 했는데. 무언가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런 나의 감정을 애써 무시하고 덮어두려고만 했다.
어째서 상처는,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오는가. 왜 내가 깊이 신뢰하는 이들로부터 받게 되는가.
내가 마음 주지 않았던,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이는 나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못한다. 나와 대립각을 세운 사람, 명확하게 나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싸워 이기면거나, 설득하면 된다. 그들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내가 마음을 준 사람이 나와 다른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거나, 허심탄회 터놓은 이야기들을 무기삼아 나를 찔러댈 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전혀 다른 얼굴로 나를 대할 때. 그렇게 나를 배신할 때, 그럴 때에는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신뢰하지 않았다면 상처받지 않았을까? 이것이 "신뢰"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인걸까. 아끼고 마음주고 신뢰할수록, 상처받게 되는 것? 나의 번뇌는 온통 내가 마음 주었던 이들인걸까 싶다.
친구가 선물해준 "아잔 차의 작은 오두막" 책에서 읽은 문구가 떠오른다. 수행은 번뇌를 가두고, 번뇌에 먹이를 주지 않고, 극복하기 위해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습관방식을 바꾸는 것.
어쩌면 내가 가장 바꾸어야 하는 건, 내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는 방식인걸까.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인걸까.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면 되는걸까. 그게 답인 것일까.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좋은 사람인지 아니지 꿰뚫어 보고, 신뢰를 쌓고, 서로의 이해관계와 신의를 현명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쳤어야 했다.
새벽 법회 때 나는 나 자신과, 가족, 주변 사람들에 대해 감사하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기도했다.
따뜻한 냄비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개구리가 되지 않고, 이 편안한 냄비 속에서 뛰쳐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길.
헤어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단내릴 수 있기를.
불행이 다가오더라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도, 그에 상응하는 행복도 함께 주시길.
소중한 내 가족, 친구, 지인들. 행복하게 맘껏 웃을 수 있는 좋은 일들 많이 생기길.
지금은 잊혀진, 하지만 과거 소중했던 이들. 편안한 삶을 살고 있길.
하지만, 몇 시간 지나 옛 사찰터에 앉아 향냄새를 맡으며 명상하니, 다른 기도가 떠오른다.
어머니의 피덩이 고통 속에 태어나, 또 누군가의 품에서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어떤 생명으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무해한 풀을 뜯어먹든, 사냥을 해서 무언가의 목을 물어뜯던, 혹은 죽은 시체를 파먹든
그 무엇은 먹고 마시는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기를.
어두운 흙 속을 절박하게 뚫고 태어나도, 해없이 빗물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그 어떤 연약한 풀도 꽃도 나무도 아니었으면.
저 폐허된 성전의 붉은 벽돌이 될 수 있는 흙 한 조각도,
수호신 조각 장식이 될 수 있는 돌 한 조각도 되지 않기를.
그 어떤 끌어당김도 없는, 원자와 분자조차 되지 않고 산산히 부서져버렸으면.
나의 고통과 번뇌를 마주하니, 이 모든 것이 그냥 내 존재와 함께 사라져버리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공허하다.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다. 오전의 감사가 오후의 원망과 허무가 된다. 감사하는 마음도, 원망과 공허한 마음도 다 내 마음, 그런데 내 것 같지 않게 휘몰아쳐서 왔다가, 안개가 걷히듯 또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다시 깊이 호흡하며, 천천히 걷는다.
마음을 먹는 것으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음은 이토록 변덕스럽게 바뀌니까.
생활 습관들을 구체적으로 바꿔야 한다. 마음을 안정적으로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그렇지 않으면 나의 몸도 마음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문득, 왕세자비 경합을 준비해야 하는 어린 소녀가 어깨와 머리 위로 물 그릇을 얻고 걷는 연습을 하는 사극 장면들이 떠오른다. 문득 왜 왕가의 일원이 되기 위한 준비과정에 걷기가 있는지 알 것 같다.
걸음걸이에 그 사람의 품격이 있다. 우아하게 천천히 걷는 데서 그 사람의 마음이 침착하고 신중한 것을 알 수 있다. 일에 쫓기지 않으며 오히려 일을 주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 절대 쫓기듯 급하게 뛰지 않겠다 결심했다.
숨쉬는 것도 마찬가지다. 급하게 숨이 찰 때까지 그렇게 나 자신의 극단으로 몰아 붙이지 않겠다. 큰 한숨을 쉬지도 않겠다.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일은 멈춰버리면 그만이다.
호흡, 침착한 호흡이 필요하다.
여기서 먹는 것처럼, 식사량도 좀 줄여야 한다. 자극적인 음식도 술도 줄이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챙겨 먹고. 가끔 간헐적 단식도 하자.
여기서 입는 것처럼, 밝은 색 옷도 자주 입자. 스스로 정갈해지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