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체성을 마주하는 순간
내가 회사에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되었던 그때 회사에서는 <휠체어 사용 아동 이동성향상 프로젝트>의 파일럿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한된 이동성을 가진 아동에게 적절한 이동 보조기기를 제공했을 때 아동의 이동 거리와 심리사회적 기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입증하기 위한 효과성 연구를 했다. 이 연구를 위해 매주 협력기관과 아이들과 부모님이 회사로 방문해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상담사와 인터뷰를 하는 아이 곁에서 둘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휠체어 사용 아동의 우울 증상과 일상생활에서의 어려움과 관련된 질문들이 이어졌고 아이는 조용히 답변을 했다. 그중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말은 9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나는 왜 장애인으로 태어났을까요? 왜 내 몸은 친구들과 다를까요?”라는 말이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때까지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9살 그 아이는 누구보다 자신의 몸과 정체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었고 아이의 질문에는 순수한 궁금증과 분노와 우울이 묻어 있었다.
영영 사전에서 찾아본 정체성의 정의는 꽤나 명확했다.
1. 정체성은 곧 내가 누구인지를 의미한다. Your identity is who you are.
2. 정체성은 나를 다른 이들로부터 구별해 주는 특징들이다. The identity of a person or place is the characteristics they have that distinguish them from others.
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나만의 고유성이랄까. 그런데 내가 살면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경험은 보통 ‘나를 구성하는 그 특성’이 남들과 ‘달라’ 나를 어떤 이유에서든지 ‘불편’하게 만들었던 때였다. 1990년대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나는 한국에서 공교육을 받고 자라는 동안 나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통계자료를 보니 내가 태어난 해에는 7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태어났고, 그중 보통 절반은 여자이니 그들 속에서 둘러 싸여 자라는 동안 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인식할 필요도 없었으니깐.
그런 내가 처음으로 내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가서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친구들을 사귀면서였다. 어학원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으며 유일하게 내 인사만 안 받아주던 아랍계 남자애, 나자르 덕분이었다. 그리고 나자르가 유독 내 인사만 무시했던 이유가 바로 내가 ‘아시아 여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특별히 그 애한테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나에게 인사는 그냥 기본적인 예의였기 때문에 모든 반 친구들에게 했던 일상적인 행위였다. 그런데 참 눈치가 없던 나는 그 애가 내 인사만 안 받아주고 있다는 걸 알았던 것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화도 나지 않았다. 인종차별주의자에 성차별주의자에게 화를 내기에는 내 화가 아까워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그런데 내 무의식은 아니었나 보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뒤끝이 길었던 나는 그 일이 있고 꽤 여러 번 꿈속에서 “봉주르, 나자르!”를 외치며 그 애를 쫓아가 괴롭히고 다녔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나의 정체성으로 내 존재가 무시당하는 경험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는 걸. 그리고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나는 다시 ‘아시아 여자’라는 정체성을 잊고 살았다.
9살 아이가 담담히 내뱉었던 그 말은 6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지금쯤 중학생이 되었을 그 아이는 이 시기를 잘 지나고 있을까. 사춘기가 찾아왔겠지? 지금은 아마 만나더라도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많이 자랐겠지.
매일밤 꿈속에서 나자르를 쫓아다니며 ‘봉주르, 나자르!’를 하는 악몽을 꾸고 있다고 신세한탄을 하는 나에게 “그런 똥덩어리(piece of shit)는 그만 잊어버려”라고 위로해 주던 베트남 친구 린과 인도 출신의 타냐 언니, 같은 ‘아시아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던 그들이 있었던 것처럼, ‘아시아 여자애‘가 겁도 없이 혼자 이탈리아 여행을 간다고 놀리면서도 다정하게 자기들이 아는 정보를 살뜰하게 알려주며 챙겨주던 유럽 친구들이 내 곁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중학생이 되었을 그 아이의 곁에도 정체성을 함께 나눌 친구와 누구보다 든든히 지지해 주는 어른들이 함께하길 진심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