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실핏줄이 남자의 동공주위로 퍼졌다. 꼭 식물 잔뿌리가 땅에 균열을 일으키며 뻗어 나가듯이. 두 얼굴의 거리는 삼십센티미터. 그의 시선은 접시 아래로 향했고, 나는 남자의 눈동자를 보았다. 우리는 마주앉아 아침 식사 중이었다.
" 난 도와 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잠잘 곳이 필요한 것 같아서."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해요."
"침대 옆에 있는 산소 호흡기는 뭐예요?
어디 아파요?"
"별 거 아니에요. "
그가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남자는 모든 일을 대수롭지 않듯이 말하는 버릇이 있었고, 여자는 매번 놀랐다.
나는 하룻밤 재워준 남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니, 나무라고 있었다. 그러니까 두 번 만난남자가,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이, 아니 이제 다 알아버린것 같은 남자에게, 아니 남자의 인생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비디오테이프를 앞으로 감아보자. 모든 시작은 비때문이었다. 11월, 헬싱키는 매일 비가 내렸다. 우산으로 비를 다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날 오후.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비를 피해 온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는 내 옆자리였다. 자연스럽게 날씨얘기에서 헬싱키, 여행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그러다가 나는 시청 앞에서 배를 타고 수오멘리나섬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고, 남자도 동행하겠다고 했다.
며칠 후, 여자와 남자는 배를 타고 수오멘리나섬에 갔다. 갑자기 비가 거세지더니, 점점 폭풍우로 변했다. 우산도 쓸모없었다. 빗속에서 러시아와 핀란드의 전쟁이야기를 들었다. 잠수함에 들어가고, 배를 만드는 곳도 들렀다. 나는 구멍이 숭숭 뚫린 러닝화를 신고 있어서 발이 시려웠다. 뭍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그는 점심초대를 했다. 주말에 야생에서 따온 버섯을 먹자고 했다. 주말에 핀란드 사람들이 숲에 가서 버섯과 베리를 딴다는 얘기가 나는 부러웠다. 재깍 가겠다고 했다.
메트로를 타고, 가게에 들러 바게뜨를 샀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안에 벤치가 놓여 있었다. 독특한 엘리베이터를 보아선 건물이 오래된것 같았다. 현관부터 상자, 신발이 쌓여 있었다. 왼쪽부터 화장실, 모서리를 꺽으면 침대, 맨 안쪽은 부엌이었다. 방 한개짜리 스튜디오는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오솔길이 나 있었다. 남자는 바게뜨를 오븐에 넣고, 바로 후라이팬을 달궈 버섯을 요리했다. 손가락굵기만한 청어도 빵가루에 묻혀 기름에 살짝 튀겼다. 따끈한 홍차를 마시며, 인터넷이 되는지 물었다. 있다고 대답했다. 어느 것이 당신 거냐고 물었더니 "heavy"라고 말했다.
"무슨 뜻 있어요?"
"내 별명이에요.친구들이 붙여 줬어요."
" 당신이 뚱뚱하다고 놀리는데, 왜 가만 있어요?"
"뭐, 사실이잖아요."
스튜디오를 눈으로 훑었다. 모든 벽과 바닥, 창문을 가리겠다는 듯이 덩치 큰 책상, 캐비넷, 화분, 선반은
잡동사니로 가득이었다.미스터 헤비의 수집품. 대여섯개의 탁상시계, 필기도구가 담긴 세 개의 머그컵, 벽선반에 꽂힌 음악씨디, 식탁 위 나무가지, 한 때 그의 생각들이 주운 물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있었다. 쌓인 물건이 허락해준 뱀처럼 길고 좁게 난 틈으로만 움직 일수 있었다. 그가 만든 공간이 남자의 동선, 사고방식을 지배했다. 집 주인은 남자의 수집품이었다. 뚱보씨는 아바타였다.
일주일 후, 우리는 낮에 뚱보씨 집에서 만났다. 친구 주말 농장에 같이 가기로 했다. 아예 배낭을 메고 나타난 내게 그가 말했다.
" 오늘밤은 우리 집에서 지내도 괜찮아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방에 물건으로 꽉찬 원룸에서 잘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부엌, 소파, 거실바닥, 천막에서 닥치는 대로 잠을 자는 여행자지만, 뭔가 께름칙했다. 쓰레기나 먼지라면 내가 청소하면 그만인데, 아파트는 정글같았다.
식물, 고철, 전깃줄, 마이크, 녹음기, 펜, 책, 스피커.
제각각 온전하고 멋진 존재지만, 사물의 위치가 독특했다. 그래서, 살짝 비틀어졌다. 한데 모아놓으니, 기괴한 구조가 태어났다. 창문전체를 덮어 빛을 막는 식물, 싱크대 서랍을 채운 쇳덩어리, 통로를 막아버린 나무로 만든 스피커. 거미줄은 나의 정신도 같이 붙잡으려 했다. 정글에서 뭔가 툭 튀어 나와 나를 까무라치게 할 것 같았다. 미리 가까운 곳에 호스텔을 찾아 두었다. 일단 외출했다가, 저녁에 결정하기로 했다.
밤10시에 아파트에 돌아왔다.
"세상에, 이 많은 물건을 언제부터 쌓아 둔 거에요?
" 곧 북쪽으로 간다고 했죠? 아주 추울텐데. 필요한거 있으면 다 가져가요.
우리집엔 없는게 없어요"
그는 털실로 짠 흰색과 빨강색 줄무늬 양말, 내복을 구석에서 꺼냈다.
"저 인형들은 뭐예요?"
"내가 만든 거에요. 할머니랑 바느질을 자주 했어요."
" 똑같은 물건을 왜 갖고 있어요?'
나는 탁상시계를 보며 말했다.
"조금씩 다 달라요." 그는 시계를 요리조리 만지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차이가 없었다. 물론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예를 들면 수집할 만한 가치가 있는게 전혀 아니었다. 딱봐도 주워다가 쌓아놓은 모양새였다. 그런식으로 부엌 싱크대위에는 서너개의 볼펜통이 있었다. 물건만 달랐을 뿐, 모두 같은 것들을 잔뜩 쌓아 놓았다. 펜은 앞으로 10년동안 쓸수 있을 만큼이었다. 그는 절대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 책장안에 있는 파일들은 뭐에요?" 벽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기에요. 15년치 될거에요."
"와! 대단해요."
" 물건 모으는 취미 있어요?"
" 언젠가 필요하겠지해서 하나 둘, 주운 거에요.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아서 그런가 봐요.
습관 같은거."
돌아가신 할머니, 지금 혼자 지내는 어머니와 가난한 추억에 대해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빠져 있었다.
뚱보씨의 말처럼, 오늘밤만 여기서 지내고, 아침에 호스텔에 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비싼 헬싱키에서 숙박비를 아낄수도 있다. 진짜 중요한 건 돈이 아니었다. 나는 게스트하우스나 호스텔이 아닌 누군가의 집에서 자는 것을 좋아한다. 일부러 그런 기회를 만든다. 아무 흔적이 없이 깨끗하게 지워진 호텔방이 싫다. 내가 긴 여행을 떠난 이유는 삶의 부스러기, 조각들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막 일어난 침대의 이불모양, 화장실에 줄지어 선 개인적인 물건들, 호스트가 비상용가방에서 꺼낸 손전등과 콘돔, 카페가 아니라 집에서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냉장고를 열며 나누는 말들을 나는 좋아하고, 더 믿는 편이다. 인생 같은 건 통으로 없다. 11월3일 밤10시, 헬싱키에 사는 한 남자의 시간부스러기를 만날 뿐이다. 그런데, 뚱보씨 만큼은 남자의 물건때문인지, 읽어 본 적 없는 일기때문인지 적어도 인생 한뭉텅이를 손으로 만진 것 같았다. 할머니피부처럼 잘게 쪼개진 나뭇결, 아기살처럼 말랑거리는 마음, 매끄럽고 짙무르고 미세한 솜털이 까슬한 식물, 밀도가 높아 손가락을 데이게 하는 금속막대기, 종이 위에 무겁게 눌린 입체적인 활자의 질감 같았다.
우리는 피곤했다. 미스터 헤비는 엄마집에 가서 오늘밤은 자겠다고 했다. 우리는 일층 정원을 통해 세탁실에 갔다. 2유로를 넣고 침대보와 얇은 이불을 돌렸다. 핀란드는 일년에 반은 비가 온다. 그래서, 아파트마다 공동세탁실이 있고, 빨래를 널고 건조시킬수 있다.
"화장실 어떻게 좀 해줘요. "
그는 닫히지 않는 욕실 수납장의 물건들을 손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문을 닫는 중에 몇 개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녹슨 세면대처럼 빨간 얼룩이 묻은 흰색 배경의 세면대. 옆에는 낚시도구, 온갖 물건들이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안본 걸로 해야지.' 한 시간 후, 그가 뜨거운 침대시트를 가슴에 들고 왔다. 집은 대충 정리됐다.
"이제 다 됐어요? 나는 그만 가볼게요. 내일 아침에 올게요"
"고마워요. 잘자요."
방주인은 떠나고, 나 혼자 남았다. 병원을 연상시키는 녹색시트를 매트리스에 깔고 누웠다. 집이 없는 여행자의 생활은 하루가 고단하다. 오늘밤 어디에서 잘지 모르는 날은 그만큼 모든 가능성이 열렸지만, 반대로 말하면 도박이다. 베개 옆에 뭔가 걸리적 거렸다. 병원 침대에 있을만한 산소호흡기가 막대에 걸려 있었다. 잠기운이 달아났다.
'맙소사. 죽을 병인가? 바이러스 옮는건 아니겠지? 빨았으니 다행이다.'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식탁에 앉아서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차를 마시며 부엌을 보았다. 가스렌지 위 후드위에 쌓인 양념통, 주위에 흩어진 빵봉지, 티백. 가스불을 켜면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았다. 싱크대 서랍은 배가 불룩해서 닫히지 않았다. 안을 보니, 고철덩어리였다. 연필통을 지나면, 손잡이가 달린 사각형 모양의 플라스틱통이 여러 개 있었다. 공업용 약품처럼 보였다. 부엌이 아니라, 무슨 철물점같았다. 눈을 둘 곳을 찾아야 했다. 식탁 옆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녹색 식물이 뱀처럼 천정까지 뻗었다. 유리창은 녹색뱀에 점령당해 보일듯 말듯 했다. 안쪽 큰 창문으로 걸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두 팔을 높이 올려 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식물요새였다. 이 집은 천정말고는 비어 있는 면이 없었다. 화장실에 갔다. 양치질 하고 세수하고 어떻게든 눈을 부칠생각이었다. 세면대는 붉은 점이 촘촘했다. '아까 청소한 줄 알았는데.' 안에는 낚시도구, 장화, 옷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샤워기 밑에까지. 화장실은 가로, 세로가 비좁았다. 물건들이 젖지 않은 걸로 보아서 그는 샤워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세면대도 두 달은 사용하지 않은 것 같았다. 화장실은 더러운 정도가 아니라, 방치된 것처럼 보였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왜 눈치채지 못했지?'
나는 식탁 의자에 새벽까지 앉아 있었다.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침대에 도로 누웠다. 뚱보씨의 천장이 곧 무너져 나를 덮칠 것 같았다. 35리터 파랑 배낭을 메고 다니는 여행자에게는 사각형의 면은 거대했다. 나의 작은 집에는 일기장, 스케치북, 색연필을 담은 서재, 소금과 후추, 카레가루를 넣은 찬장주머니, 겨울옷을 보관한 옷장, 카메라, 향수, 비키니,원피스, 수건, 샴푸, 로션, 엽서, 하모니카를 넣기에 충분했다. 가끔은 제때 물건을 못 찾았다. 철지난 겨울 외투가 내년에도 어김없이 필요한 줄 알지만, 누군가에 주었다. 안 그러면 나는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을 겨울처럼 지내야 한다. 버리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상이 내게 오지 않는다는 진실을 나는 몸으로 익혔다.
벨소리가 울렸다. 뚱보씨는 눈이 충혈된 채 왔다.
"어제 한숨도 못 잤어요. 기분이 안 좋아요. 커피를 빨리 마셔야겠어요."
계란과 빵, 버터, 홍차, 커피를 앞에 두고 우리는 앉았다. 나는 몇 마디의 말을 하고, 줄곧 침묵했다.
가방을 지고, 아파트 밖에 나왔다. 뚱보씨가 포옹을 하려고 어깨를 내밀었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굳바이 라고 말했다. 나는 뒤도 돌지 않고 계속 걸었다. 호스텔에 체크인을 했다. 창가에 있는 윗층침대를 배정받았다.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배낭을 열었다. 잡동사니들을 창턱에 꺼냈다. 반은 왼쪽, 나머지는 오른쪽. 어느 칸으로 갈지 애매한 소지품도 있었다.
'어떡하지? 다음에 분명 필요할 텐데.'
'내가 돌았지. 그 스튜디오를 봤잖아. 너도 그런 인생을 원해?'
고개를 흔들었다. 쓰레기통을 가져 왔다. 빗자루처럼 양팔로 몽땅 쓸어버렸다.샤워를 하면서, 길을 걷다가 나는 멈춰서 팔로 머리를 감싸고,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