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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Nov 01. 2020

눈이 만든 이야기

눈이 빚어 낸 일이었다. 동화책 속 풍경도 그 일도 모두.

겨울 눈 쌓인 거리가 영화 한 장면 같았다. 나는 잠잘 곳이 없었다. 하룻밤 지낸 호스텔은  예약이 끝났다. 빈 침대가 없었다. 계획없이 다니는 여행자에게 이 도시는 틈이 없었다. 노르웨이 북쪽 끄트머리 트롬소. 오로라를 보기 위해 세계 여행자들이 일찌감치 방을 잡아 놓았다. 게다가 곧 크리스마스였다. 배낭을 메고 잠자리를 찾기 위해 저녁거리를 걷다 그만 미끄러졌다. 엉덩이로 썰매를 탔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온 몸이 얼얼하고 마음까지 힘이 빠져 주저 앉았다.


그 순간 “괜찮아요?” 라는 말과 함께 손이 나타났다. 그 팔을 잡고 일어서서 키높이가 같아졌을 때, 한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우리는 말을 주고 받았다. 곧 내 사정을 알게 된 그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자신은 러시아에서 온 교환학생이라고 소개했다. 

" 오늘 하룻밤은 재워 줄 수 있어요."


버스를 타고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밭을 헤치고 도착한 곳은 대학생들이 사는 기숙사 옆에 떨어진 휴게실 건물이었다. 부엌과 텔레비젼을 갖춘 긴 소파가 있는 라운지였다. 난방도 잘 되고, 낡은 사우나까지 있었다. 호스텔 보다 훨씬 아늑하고 조용해서 한 눈에 맘에 들었다.


빅토르는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한 손에 쌀포대, 다른 손에는 아보카도와 수프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아침에 장 보러 갔었다. 아보카드를 만지작거리다가 비싸서 도로 놓고 나왔다. 내가 집으려던 것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 개 더 많았다. 이건 지금 누가 내게 장난을 치고 있는게 분명하다.

"배고플 것 같아서요." 

"정말 고마워요." 식료품을 안으면서 내가 말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요. 옆집 이층 첫번째가 내 방이에요.

음. 창문에 눈을 던져요. 그게 우리의 신호에요."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빅토르는 사라졌다.


나는 찻물을 끓였다. 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홍차 티백을 넣었다. 배낭에서 빵, 레몬, 버터를 꺼냈다.

레몬 한조각을 찻잔에 퐁당 빠뜨렸다. 빵에 버터를 바르고, 연노란색 아보카도를 폈다. 목구멍이 뜨겁고, 위가 따뜻해졌다. 음악이 간절했다. 휴대폰에 몇 번이나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는데, 도무지 연결되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눈을 뚫었다. 오른쪽 모퉁이를 꺽었다. 눈을 뭉쳐서, 이층 창문에 던졌다. 눈은 창문에 닿지 않았다. 세 번째는 성공이었다. 눈뭉치가 창문에 맞았다.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갑자기 나는 웃음이 터졌다.

'이게 뭐지?'

눈은 나를 시골집으로 데려갔다. 아주 어릴적에 눈사람을 굴렸던 기억, 눈싸움을 하던 추억이 생각났다. 자세히 보니, 방에 불이 꺼졌다. 나는 라운지로 돌아갔다. 샤워를 하고, 수프를 끓여 먹었다. 그 때, 노크소리가 났다.

빅트로였다. 

"컴퓨터 게임 조금만 할께요."

"그럼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인터넷도 그가 연결시켜 주었다.

빅토르는 게임은 하는둥 마는 둥 하고 어깨를 반쯤은 내게로 돌려 여행이야기를 물었다. 

한참을 얘기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내가 물었다.


“ 낯선 사람 안 무서워요?” 
“ 무서워 해야 되나요?”
“그런건 아니지만, 보통은 사람들이 겁을 먹어요. 알지 못한다는 게 두렵게 만들죠.”

빅토르는 나에게 행운을 빈다며 자기 방으로 갔다. 나는 휴대폰에서 음악을 틀고, 빨간색 양초를 켰다.

잠꼬대에서 나는 "아, 내방." 이라고 말했다.

아침 모터소리에 잠을 깼다. 눈을 치우는 기계소리, 썰매타는 아이들, 스키썰매에 딸을 태워 유치원에 데려가는 아빠.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한 조각 보았다. 빅토르에게 엽서를 썼다. 겨울방학때 암스테르담에 놀러 간다는 얘기가 생가나서, 주머니에 있던 5유로를 넣었다. 어제 나처럼, 빅트로도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시며 마음을 녹일 수 있기를 바랬다.

가까운 곳에서 바다를 발견했다. 피요로드 위에 눈뭉치를 걸어 놓은 듯한 하늘. 바다의 파도가 얼어붙었던 눈물을 녹였다. 아무도 없는 노르웨이 겨울 바닷가에 혼자 계속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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