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호스텔 도미토리에서, 그녀는 짐을 싸고, 나는 구석에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흔한 여행자끼리 대화는 나를 독일의 예술도시, 드레스덴으로 옮겼다. 그녀의 단 한마디때문에 즉흥적으로 행선지를 결정했다. 나는 늘 이런식이다. 어떤 계획이나 목적없이 여행했다. 남기기로 했던 연락처는 사라졌다. 극장대신 어떤 예술가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늦은 오후, 남자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림, 기계, 서랍, 쇳조각, 액자, 붓, 물감, 먼지가득한 소파, 티테이블, 식물, 이젤이 시야에 펼쳐졌다. 아뜰리에였다. 왼쪽으로는 화장실, 작은 부엌, 방이 나타났다. 복도 끝 작은 사각형, 오늘 나의 방이다. 소파, 창문턱 화분들, 책상, 벽 한면은 전부 책이었다. '서재구나.'
아뜰리에 아니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인사를 나눴다. 나는 체코국경을 넘어 몹시 피곤했다.
같이 저녁을 먹고, 나는 잠에 빠져 들었다. 귀가 깼다."삐삐삐비" 작고 규칙적인 베이스기타같은 소리가 들렸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문앞에 섰다. 범인은 통로쪽이었다.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손잡이를 돌리고 천천히 밀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볼륨은 커졌다. 일정한 박자에 콧소리 리듬까지 더해졌다. 틀림없이 머리 위였다. 나는 턱을 천장으로 들었다.
" 무어 씨? 당신 거기 있어요?"
남자의 잠꼬대와 함께 소리는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빵, 버터, 치즈, 우유, 계란 후란이, 홍차. 나는 아침을 먹었고, 그는 나를 보며 이야기만 했다. 나는 소리에 대해 물었다.
" 새벽 세시에 맞춘 알람이었어요.
지금 라마단기간이라서. 첫 식사는 해가 진후 저녁9시에 먹고, 두 번째 식사는 새벽3시에요. "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얀 피부, 당근색 머리카락을 가진 독일인에게 이슬람은 조금 뜻밖이었다. 마지막날까지 그가 기도하는 모습을 본적은 없다.
하룻밤만 자고 떠나려던 나를 붙잡은건 책장 속 예술이었다. 에곤쉴레, 렘브란트, 반고흐, 고갱. 밤마다 잠들기 전에 그들과 데이트를 했다. 낯선 이름도 늘어났다. 브뤼겔, 루벤스. 무어씨가 한 명씩 골라, 설명해 줬다. 그림서적으로 가득한 책방을 주머니 속에 담고 싶었다. 매일 오른쪽 뇌에 저장했다. 언제든지 마음속에 펼칠 수 있도록. 본능적으로 나, 여행자를 끌어 당기는 것은 미스테리다. 수상하고 낯설고 이름모를 존재에 끌린다. 보통 사람들이 출근할때, 나는 명탐점 셜록홈즈처럼 추리하는 게 일상이다. 수수께끼를 풀고, 이름을 붙인다. 헝클어진 물건과 마음에
신경이 많이 간다.
집 왼쪽영역은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해는 창문 너머 언덕에 가려졌고, 반대편은 벽이었다. 바깥세상은 초록과 빛으로 눈부신 여름이었지만, 안은 초콜렛 색이었다. 서재와 부엌을 연결하는, 남자가 자는 중간세계는 낮에도 침침했다. 부족한 공기와 빛, 창가에 걸린 서너 벌 똑같은 검은색 셔츠. 맞은편에 자리잡은 나무서랍은 주인행세를 했다. 서류를 작성하고 들어가는 국립도서관 지하실에 있음직한 위용을 뽐냈다. 넓고 얇은 서랍을 한 개씩 열었다. 모두 종이었다. 입이 벌어졌다.
'진짜 화가구나.'
때맞춰 나타난 무어씨는 나의 얼굴표정을 읽었다.
" 네팔종이, 일본종이, 스페인종이에요.
만져보면 알겠지만, 두께,재질이 다 달라요."
그는 신난듯이 떠벌렸다. 마치 종이가게 사장님처럼 열을 올렸다. 옛날에는 종이장수가 왔다고 했다. 종이값이 비싸서, 아껴 쓴다고 했다. 옆으로 난 나무계단을 밟았다. 매트리스가 천장 바로 밑에 있었다.
무어씨의 불룩한 배가 샌드위치처럼 끼어 버릴 것 같은 낮은 천장이었다. 남자는 종이를 보살피는 집사처럼 같은 방에서
함께 잤다.
어느 오후, 테이블 아래 쿠키통을 꺼내다가 체스판을 발견했다. 저녁에 조심스럽게 배우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 내가 체스 챔피언 되고 싶었다는 걸 알죠?"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미술관 가이드를 자청했던 모습은 없어지고, 지적허영심이 가득한 숫고양이처럼 그르렁거렸다.
그는 어렸을 때 체스 토너먼트하러 소련까지 갔다. 동독시절, 동급생에게 마르크를 받고 가르치기도 했다. 챔피언을 포기한 후로는 체스를 오랫동안 두지 않은 눈치다. 금식을 깨고, 첫 커피를 마시는 밤의 시간에 남자는 심리적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어느 달밤, 그가 체스판을 꺼냈다. 말을 놓는 법, 움직임을 설명했다. 그리곤, 매일 우리는 밤 열한 시에 체스를 두었다. 나의 왕은 늘 먼저 죽는 운명이었지만, 조금씩 오래 살았다. 애송이같은 나와의 대적이었지만, 체스는 그의 양볼을 조금 붉게 물들였다. 기억을 떠올리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꼬마때 체스를 배웠고, 체스판도 물려받았다. 부모로 부터 한 푼의 재산도 받지 못 한 그에게 유일하게 대물림된 물건이다. 체스판에는 촛농, 컵자국, 커피 얼룩이 묻었다. 모가지가 똑딱 부러진 기사의 말은 누가 주인인지 확실했다. 체스는 할아버지와 본인,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묶는 끈같았다. 미스터 무어는 러시아를 사랑한다. 러시아 문학, 오페라.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가장 인정받은 곳이, 동독이 아니라 소련이라고 했다. 체스를 둘 때, 그는 딴사람으로 변신했다.
"체스에서는 가장 약한 자들을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중요해요."
"체스는 한 마디로 가능성입니다. 말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가능성."
미스터 무어는 성장이 빠른 열다섯 살 소년처럼, 나를 따라 다녔다. 부엌, 서재, 아뜰리에, 마당, 심지어 강가 산책까지. 사적인 영역이 발달된 나는 피곤했다. 그것이 유일한 남자의 휴식이었다. 대부분 바깥에 딸린 작업실에서 박혀 기계와 시간을 보냈다. 안에서 일할때는 늘 라디오, 오디오북을 들었다. 아니면 나에게 말을 걸어서, 내 목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기회가 왔다. 주인은 자전거 타고 멀리 떨어진 식료품점에 갔다. 나는 거실을 활보했다. 덩치큰 쇳덩어리들, 화학용품, 금속조각, 액자, 파스텔, 물감으로 알록달록 해진 책상, 식물줄기, 먼지, 투포환. 아뜰리에는 화가의 주름진 뇌같았다. 그가 사는 세계의 전부, 자신이 열중하고 지각하는 우주, 가장 안전하고 익숙한 지구의 콧구멍이다.
무어씨는 나에게 몇 가지를 졸랐다. 그림모델이 되달라고 했다. 그는 특별한 용무가 있을 때가 아니라면, 외출을 하지 않았다. 건물 입주자들은 모두 예술가였다. 남자에게 초대받은 여행자들은 바깥에서 수혈되는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여행자의 흔적은 여기저기에 있었다. 특히 통로에 걸린 초상화 뮤즈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포름알데히르 용액에 고정된 박물관 수집표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여행을 가자고 꼬셨다. 체코에 있는 성당에 대해 얘기했다. 인간의 해골과 뼈로 장식한 샹들리에, 수천개의 유골로 벽면을 채운 납골당 이야기를 자주 했다. 무어씨는 며칠씩 차가운 바닥에 앉아 엉덩이가 얼얼할때 까지 스케치를 했다. 공동묘지에 환장한 나도 해골성당에 솔깃해서, 프라하에 있을 때, 여행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했다. 남자는 갑자기 복도쪽으로 걷더니, 찬장을 열고 깊숙히 보관한 뭉치를 꺼냈다. 여러 겹 쌓인 포장지를 벗겼다. 책이었다. 납골당에서 받은 영감으로 손수 만들었다고 했다.
예술가는 엣칭 기법을 보여줬다. 그림을 금속판에 새겨, 산화용액에 부식시켰다. 다음 날, 우리는 작업실에 갔다. 좁은 공간은 거대한 기계 한대가 차지했다. 홈이 파인 금속판에 잉크를 칠했다. 뒷뜰에 산책하던 나는 종종 울려 퍼지는 오페라음악과 검은색 등을 마주쳐도,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동굴을 빠져 나올 땐, 두손이 새까맣게 그을렸다. 판을 들고, 아뜰리에로 갔다. 액자와 공구에 가려졌던 기계 전체를 처음으로 대면했다. 팔백킬로그램이라고 했다. 인쇄기였다. 기계를 두 팔과 가슴,윗몸 전체 힘으로 눌렀다. 인쇄됐다.
다음은 옆에 있는 나무칸마다 수북한 금속조각을 판에 배열했다. '아, 활자였구나.' 영어, 아랍어 글자판이 있었다. 남자는 크고 뚱뚱한 손으로, 손톱크기보다 작은 조각을 집어서 한개씩 배열했다.
"무슨 뜻이에요?"
"당신 이름."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 한 페이지를 쓰려면, 얼마나 걸려요?"
" 이틀정도."
" 책한권 만들려면, 몇 달 걸려요. 박물관, 미술관에 팔리면 750유로 받는데. 운이 좋아, 한권 팔면 방세를 안 밀리죠."
무어씨는 지난 겨울에 머리 자를 돈이 없어서 단발머리였다는 점과 자전거는 버스비가 없어서 탄다고 고백했다. 머리 속 꼬마전구에 불이 동시에 켜졌다. 미스터 무어는 북디자이너, 작가, 인쇄소 기계공, 화가, 종이가게 사장, 예술가였다. 퍼즐이 완성되었다.
" 당신은 미쳤어." 내가 말했다.
"뭔 헛소리하는 겁니까?"
" 당신같은 예술가가 가난한게 이상하잖아요.
내가 당신이었다면, 부자가 되었을 거에요."
"어떻게요?"
" 북바인딩 워크샵, 에어비앤비.
당신 머릿 속 지식, 유머, 괴담만 털어도 팟캐스트 100회 분량 나올걸요.
나같은 인간은 당신 버스 일주일치를 박물관 입장에 쓰고, 기뻐해요.
종이 써는 작두, 인쇄기, 책 누르는 쇠, 팔힘을 기르기 위해 산 쇳덩어리 투포환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해요."
" 그게 다 뭔지 아무것도 난 몰라요."
" 알필요 없어요.
진짜 중요한 건 당신 자신을 믿는 거에요.
내 자신이 버스를 타고, 구멍나지 않은 옷을 입고, 물감과 종이를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가치를 믿는 거요."
"이번은 당신이 여행할 차례예요.
나도 시작할 때, 아무것도 몰랐어요.
기차 옆자리에 앉은 사람, 짜이 장수, 버스 운전수, 시인, 도둑, 철학자, 호스텔 주인이 알려 줄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