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살미야끼
그렇게나 새벽 4까지의 파티를 즐기고 Fun의 "We are young" 노래를 머리 속에서 반복 재생시키며
'젊은데 내일 수업도 가고 한나도 만나야 해'
굳은 결심으로 잠이 들어 어제 마신 보드카의 기운으로 아침에 눈을 뜨긴 떴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이 곳에서의 삶이 매번 그러하듯 모자와 장갑과 부츠를 신고는 빈 속으로 학교를 갔다. 이 날의 이야기에 오늘은 간단한 제목을 붙일 것인데 그것은 <해나의 집>이다.
<해나의 집>
어느 날 페이스북에, Henna라는 이름의 사람이 한국인들과 만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지금 막 부산에서 교환학생을 하다가 돌아오게 되었고 오울루에 교환학생을 온 한국인들이 있다는 걸 들었는데, 이걸 보면 자신에게 연락을 하라는 글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그녀의 집으로 초대받게 된 것이다.
해나는 여기서 Visual Art를 전공하고 있고 동시에 가르치기도 하고 있다. 그녀는 세 명의 자녀가 있는 사람으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다정한 미소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나는 그녀 앞에서 말문이 막현던 어제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술술 이야기를 꺼내고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내가 이렇게나 대화를 잘 할 수 있고 의사소통 부터 농담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도대체 어젠 왜 그랬을까라고 생각했다.
해나의 집은 나무로 지은 작은 집으로 내부는 지하와 복층까지 모두 앤틱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문을 열자 고양이 두 마리가 뛰쳐나와 반겼고 오직 한 마리의 이름만 기억이 난다. 만타였는데, 개냥이였다. 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내가 핀란드에서 지내며 적응하는 이야기들을 했다. 그리고 핀란드 스파이가 되려한다면 여유롭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공포의 살미야끼에 대한 대화도 나눴다.
살미야끼는 핀란드인의 국민 캔디이다. 감초로 만든 검정색깔의 사탕인데, 사탕 외에도 젤리, 초콜릿 심지어는 살미야끼 보드카 샷도 있다. 무슨 맛이냐 묻는다면 도대체 무슨 맛인지 전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먹기 힘든 맛이다. 한국에 살미야끼를 사들고 돌아와 핀란드인의 필수 캔디라고 소개하며 친구들에게 몰래 먹이는 재미가 있었다.
아이스크림도 있다던데, 말을 하던 차에 해나의 남편과 아이들이 들어왔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 이전과 다르게 많이 긴장이 되어 말이 좀 꼬이게 되었는데, 마침 해나의 남편이 살미야끼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해나는 이거 살미야끼네! 하더니 덜어 먹어보라고 하였고, 내가 놀라면서 사진을 찍고 싶다 하니 한국인들이 자주 음식 사진을 찍는 것을 알고 있다며 웃었다.
아이스크림은 조금 낫지 않을까. 기대보다는 더 큰 두려움으로 한 스푼을 떠 먹어 보았으나 살미야끼는 살미야끼였다. 그래도 젤리나 사탕보다는 나은 맛의 아이스크림이었는다. 기대하는 그들의 눈 앞에서 "억 이런 미친맛이 나다니" 라고 외쳐버릴 수가 없어서 힘듦을 참으며
"좀 더 먹으면 즐기면서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했다.
짧은 만남이었으나 핀란드 가정집을 방문할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해나에게 고마웠고 완벽한 이방인인 나를 한국인이란 이유만으로 자신의 집에 초대해주었고, 심지어는 핀란드에 왔다면 제대로 눈에서 놀아보아야 한다며 썰매까지 빌려주었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벅찬 호의였다. 감사한 마음이 듦과 동시에 이전까지의 삶에선 없었던 완벽한 새로움 덕분에 흩날리는 눈발 조차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활짝 웃으며 커다란 대야 같은 빨간 썰매를 신나서는 들고 돌아갔더랜다.
헤어질 때 해나는 다음주에 학교에서 교환학생 상담 이벤트가 열린다고 했다. 자신이 한국으로 파견 된 교환학생을 대표하여 가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한국사람이니 옆에서 한국의 이야기를 직접 나눠 주면 좋겠다며 자리에 참석해주는게 어떻겠냐고 하였고, 나는 좋은 기회이자 새로운 이벤트인 것 같아 흔쾌히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을 똑바로 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해나와의 대화를 통해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말을 할 수 있을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간 잔뜩 긴장을 했기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상황이 아니라 말 자체에 집중하느라 고장난 구글 번역기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번 주 토요일 밤 10시에 다른 기숙사의 라운지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 받았지만 조금 부담스럽다고 느끼고 있다. 오울루에서 지낸 지 한 달채 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히 겪어야 할 과도기일텐데, 사람과 일 대일로 만나 대화하는 것은 괜찮지만 사람이 많은 그룹안에서는 아직 씩씩하게 말하는 걸 어려워하고 있다.
해나의 집에서 돌아온 밤에 나와 같은 학교에서 파견된 한국 언니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기숙사에서 따뜻하게 끓인 뱅쇼를 내게 나누어 주었고, 크래커를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어는 유창하다. 이들 덕분에 아직까지 한국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진 않았다. 이곳에서 사는 일은 어떨까 상상해본다. 좋은 하루를 보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