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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네이수 Feb 02. 2024

나구리판치(殴リパンチ)

BOCCA  COFFEE   

암스테르담의 겨울 날씨는 혹독하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네덜란드에서 겨울을 보낸다면 제2의 쇼펜하우어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긴 비행을 마치고 호텔 침대에서 누워 잠을 청하는데 어디선가 카트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무슨 쓰레기차가 이렇게 오래 지나가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였다. 카트가 지나가다 갑자기 천둥이 치는 소리까지 더해진다. 진짜 천둥은 아니었고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바람 소리만 가득 찬 깜깜한 방에서 잠이 깬 채 눈만 깜빡깜빡 떠 있는데 닐 게이먼의 <The North Mythology>의 내용이 생각났다. 북유럽신화에서 최고의 신인 오딘은 지혜의 신이면서 죽음, 생명, 전쟁, 승리 그리고 날씨의 신이며 바람을 다루는 신이기도 하다. 오딘뿐만 아니라 북유럽신화에 나오는 다른 신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사람들에게 자애로운 신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대부분 다혈질에 서로 지지고 볶는 모습이 이곳 날씨처럼 호전적이다. 네덜란드처럼 물, 바람과 싸워온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북유럽신화에 나오는 이런 사납고 심술궂은 골칫덩어리 신들은 숭배의 대상이 아닌 퇴마의 대상이 아닐까 싶다.


바람아 멈추어다오.


오랜 세월 해상무역을 해온 이들에게 바람은 축복과 행운의 상징이면서 불운과 저주의 상징도 될 수 있다. 오늘의 바람세기로 보아하니 나는 오늘 오딘한테 날벼락 맞을 운명이지 않을까라는 예상이 든다. 이럴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네덜란드에서 이런 날씨일 때 좋은 점은 머리스타일에 공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예쁘게 드라이를 하더라도 1분 정도 걷다 보면 오딘의 바람에 머리를 가차 없이 쥐어뜯기기 때문에 항상 쑥대머리가 된다.

여기가 네덜란드인지 제주도인지 헷갈릴 정도로 바람이 많이 불면 비행기는 어떻게 뜨나 걱정이 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KLM항공의 파일럿들은 네덜란드의 최악의 날씨들을 경험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이 많다고 한다. 항상 최악의 기상상태를 대비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훈련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들이 비행기를 띄운다면 띄울 수 있기 때문에 믿어도 된다.  




Bocca Coffee


Bocca Coffee를 들어가면 가장 보이는 것은 큰 로스터기였다.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로스팅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로스팅은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다. 원두의 특성에 따라 어떻게 로스팅을 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너무 덜 볶으면 풋맛이 나고 너무 볶으면 탄맛이 난다. 거기에다 결점두가 들어가 있으면 전체적인 커피의 맛을 망칠 수 있기 때문에 고려해야 하고 반대로 결점두가 없는 specialty beans를 사용하는 경우 더욱더 신중하게 원두의 특성을 고려하여 로스팅해야 한다. 당연히 어떤 사람이 로스팅을 하느냐에 따라 별 볼일 없는 커머셜도 스페셜티 뺨치는 맛이 나올 수 있고 비싼 스페셜티 커피를 최악의 커피로 만들 수 있다.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여 얻은 경험을 통해 로스팅을 오래 할수록 장인이 되기 마련이다. 로스팅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도 드는 아주 힘든 일이다.


다행히 자리가 생겼다! 유후!

거리가 한산한 것과 달리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Bocca Coffee의 내부는 바 형태의 테이블이 중간에 차지하고 있고 중앙에서 바리스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마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활기차게 이야기를 하면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이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지만 여기는 암스테르담이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서서 먹고 마시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나는 오늘은 암스테르담 스타일로 서서 커피를 마셔야겠군이라고 생각하며 주문을 했다.




에스프레소(3.15유로) 그리고 플랫화이트(4.20유로)




에스프레소 주문이 들어오면 바리스타들은 솔직히 조금 긴장하기 마련이다. 왜냐면 에스프레소는 바리스타의 손맛을 많이 타기 때문이다. 물론 기계가 좋을수록 일정한 맛을 내는 경우가 많아서 바리스타의 스킬이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바리스타의 기술과 경험에 따라 에스프레소의 맛은 천차만별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템핑'이다. 템핑은 그라인딩 된 원두를 필터(filter)에 담고 커피가 고루 추출될 수 있도록 윗면이 평평하게 탬퍼로 눌러주는 것을 말한다.  템핑 한 커피의 윗면이 평평하지 않다면 고압으로 물을 흘렸을 경우 골고루 추출되기 힘들다. 게다가 채널링 현상이 생기면 뜨거운 물이 채널을 따라 흐르게 되고 이것 또한 골고루 추출되는 커피가 아니다. 숙련된 바리스타는 잘못된 추출을 방지하기 위해 감으로 혹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실수를 최소화한다.


기다리면서 매장에 전시된 커피들을 둘러보니 보카(Bocca)라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주로 남미에서 온 원두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크게 세 가지 상품으로 나뉘었는데 아래와 같다.




JOSE OLVIDO- Pacamara washed, El Salvador, Black tea, cherry&grapefruit (Filter)

GUSTO Berry, Honey, Milk chocolate

SOULMATE Dark chocolate, nuts, sweet


'JOSE OLVIDO'라면 '잊혀진 호세'라고 해석되겠다. 뭔가 서글픈 느낌이 드는 게 영화의 제목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세월의 풍파를 겪어서 얼굴의 이목구비가 알아볼 수 없는 어느 한 조각상의 이름처럼 느껴진다. 이름에서 느껴지는 중후한 느낌과 달리 홍차, 상큼한 체리, 자몽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상당히 생뚱맞지만 호세는 꽤나 발랄한 사람인가 보다.


상큼 발랄한 호세의 맛은 어떨까.  


Pacamara는 커피의 품종을 말한다. pacamara나무에서 나온 커피빈으로 washed 형식으로 커피를 수확했다는 것인데 이 말은 커피체리를 딴 후 커피과육을 벗긴 후 이것을 물로 씻어낸 후 말린다. 이 과정에서 과육을  그대로 남기나 씻기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긴 하는데 일단 이 워시드 프로세싱을 하게 되면 커피생두를 변화시키는 조건이 없어지기 때문에 커피생두의 특성에 집중된 생두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만드는 방법이 조금 까다롭긴 해도 생두 본연의 맛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스페셜티 커피들이 워시드 방식으로 프로세싱한다. 이 포장지의 정보로 봐서 이 JOSE OLVIDO은 정석대로 수확된 스페셜티 싱글 오리진이라고 볼 수 있겠다.


Gusto의 경우는 단맛이 강조된 커피인 거 같다. 베리, 꿀, 밀크초콜릿의 맛이 특징인데 이렇게 원산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로스터가 다양한 커피빈을 조합해서 만든 시그니처 작품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한 종류의 커피만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볶은 커피를 어떠한 비율로 섞느냐에 따라 새로운 커피빈이 탄생된다. 그래서 로스터들의 경험과 노하우 그리고 지향하고자 하는 커피를 느끼고 싶다면 이런 시그니쳐 커피를 경험해 보는 것도 좋다.


이름도 멋진 Soulmate. 보카커피가 생각하는 소울메이트는 다크초콜릿, 넛츠 그리고 스위츠의 느낌을 떠올리는 커피인가 보다. 뭔가 잊혀진 호세보다는 진지한 느낌이다. 둘이 혹시 바뀐 게 아닐까? Gusto와 마찬가지로 싱글 오리진은 아니고 여러 커피빈을 조합한 상품이다. 정확하게 어떤 원두가 어떤 비율로 섞었는지 궁금했지만 이 집 비밀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 이런 커피의 경우 어떻게 추출해 먹는 게 좋을지 모르겠지만 에어로프레스와 같은 기구로 추출한다면 정확한 맛이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Nutty Olvido 잊혀진 너티


주문한 에스프레소와 플랫화이트가 나왔다. 에스프레소를 먹을 때 처음에는 커핑 할 때처럼 슬러핑으로 한번 마셔주고 그다음 물로 한번 입을 헹군 후 에스프레소가 혀에 다 골고루 닿을 수 있도록 하여 맛을 느껴보았다.


일단 에스프레소에 바디감이 없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기름기 없이 깔끔하게 입안에서 확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신맛이 강렬히 자리 잡긴 했지만 너티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너티한 부분은 내가 일부러 찾아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약했다. 마치 꿈을 꾼 건지 너티한 맛이 있었다가 없었다. 에스프레소가 조금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마셔보니 뇌를 강하게 때리는 신맛이 있었다. 눈이 질끈 감길 정도로 레몬의 강렬한 신맛이다.


플랫화이트를 마셔보니 또다시 내 뒤통수를 강렬히 치는 맛이 올라왔다. 내 혀 안에서 느껴지는 플랫화이트는 세계타이틀을 두고 맞붙은 두 복서의 쌍펀치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원두의 신맛과 우유의 고소함이 서로 강타하는 느낌이다. 머릿속에서 나구리 펀치(나구리판치(殴リパンチ)가 떠올랐다. 나구리 펀치는 사실 내가 일본어 수업을 들을 때 일본어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표현이다. 일본은 기차가 지나가는 도로가 있기 때문에 기차가 지나갈 때 교차되는 도로가 차단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게 되는데 보통 한대의 기차가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두대의 기차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교차에서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선생님께서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두 명의 중년 여인들의 대화가 들렸다고 한다.


"어머, 나구리 펀치 다네. (あら, 殴リパンチだね.)"


두 개의 기차가 서로 교차하며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 모습, 일본어의 나구루(殴る なぐる)라는 동사는 '치다'라는 뜻이고 여기에  영어의 punch가 합성되어 새로운 단어가 되었다.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이 플랫화이트.. 제대로 나구리 펀치다. 전혀 다른 두 맛이 입안에서 맞부딪치는 게 서로 교차하고 있는 기차가 지나가는 것 같다.


Bocca coffee가 추구하는 남미의 스페셜티의 가치는 사실 내가 마신 플랫화이트에 강렬하게 살아있었다. 남미 스페셜티의 산미와 우유의 고소함, 둘 다 좋은 점이고 놓칠 수 없으므로 나라면 이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가치가 다 의미가 있기에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곧 그 가치가 가진 어떤 부분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플랫화이트는 아니지만 이 커피에서 보카커피만의 특징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커피는 보카커피가 추구하는 가치를 잃지 않았다. 내가 우유의 부드러움에 커피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맛을 최고로 친다고 할지라도 보카커피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원두의 고유한 맛 그 맛을 잃기 않기 위해서 고집 있게 밀어붙이기로 한 것이다.


  다른 가치와의 조화를 위해 자신의 가치 일부분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맞부딪히며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고 드러낼 것인가?





Bocca Coffee에서 나오니 오딘할배가 화가 많이 풀렸는지 바람이 꽤 잦아들어 있었다. 하찮은 코리안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호텔로 돌아가 따뜻한 침대와 한 몸이 되는 상상을 하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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